Search

[기고] '임정의 아들' 김자동, 임정 품 안에 잠들다.

- 작게+ 크게sns공유 더보기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기사입력 2022-08-30

[사진출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항상 겸손하시고 선하며 인자하신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이 지난 23일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향년 93세.

 

선생은 4월혁명의 공간에서 탄생한 ‘민족일보’ 기자 출신으로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에 적극적이셔서 2006년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으로 선생을 모실 수 있는 기간이 있었다.

 

그리고 2004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의뢰한 4월혁명 공간 ‘민족일보 구술사업’에 선생을 13시간가량 구술한 적이 있어 선생의 일생을 좀 알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김자동 선생 하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건립과 민족일보 기자,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일월서각, 1986), 『모택동 전기』(한수인, 일월서각, 1988) 등의 번역 활동,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 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선생의 집안은 3대째 아니 4대째 독립운동을 했다.

 

자녀들도 아버지를 도와 임시정부(임정) 관련 사업들을 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의 집안은 독립운동의 대가로 3대가 고난을 겪은 것도 부족해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묘소가 남과 북, 중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다.

 

할아버지 김가진은 중국 상하이 홍차오로 만국공묘에, 아버지 김의한은 평양 재북 인사 묘역에, 어머니 정정화는 대전 현충원에 묻혀 있다. 그리고 선생은 어머니가 계신 현충원에 가려 했지만, 여의치 못해 일단 경기도 광주 가족 묘지에 묻혔다.

 

선생의 가족은 죽은 뒤에도 이산가족이다.

 

이 모든 것은 독립되지 못한 외세에 의한 분단의 대가이다.

 

[사진출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할아버지 동농(東農) 김가진

 

김자동 선생의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은 세도가인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얼(庶孼)이었기에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서얼 관직인 규장각 검사관으로 출발해서 외교통상, 통신 등 실용적인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고 일본에도 갔다 오면서 개화사상에 눈을 뜬다.

 

1894년 갑오경장 시기 개화파 중심의 김홍집 내각에서 군국기무처의 일원으로 우리나라 최초 헌법 성격을 띠는 홍범 14조를 기초한다.

 

독립협회 창설 주역의 한 분으로, 독립문 현판서의 ‘독립문’ 글씨를 한자와 한글로 썼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민영환 등과 함께 반대하고 대한협회의 회장으로 일진회의 한일합방 주장에 반대했다. 그리고 1910년 일제 강점 후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1919년 3.1운동 직후 제2 만세운동을 계획하며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지하조직 ‘조선민족대동단(대동단)’을 결성하며 총재에 추대된다.

 

그리고 그해 아들 김의한과 임정이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다.

 

이후 임정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고문이 된다.

 

김가진은 의친왕 이강의 중국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이강이 망명 시도 중 중국 단둥에서 발각되어 무산된 후 77세를 일기로 상해에서 순국한다. 

 

 

아버지 성엄(誠广) 김의한 

 

아버지 김가진과 중국에 망명한 김의한은 대부분 임정 관련 활동을 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임정이 항저우와 자싱으로 분산 이전할 때 이동녕, 김구, 엄항섭 등과 함께 피신한다. 그리고 일본의 중국 침략이 노골화되자 임정은 1932년부터 1938년까지 난징, 청사. 광저우, 류저우로 기나긴 피난 생활을 하다 충칭에 안착했다. 그때까지 김의한은 임정 요인과 함께 시련을 이겨냈다.

 

1942년 34회 임시의정원이 한국독립당(한독당), 조선민족혁명당 등 각 정당 및 무소속 인사들을 망라하여 명실공히 전 민족적인 의정원을 구성할 때 김의한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선전위원과 외교위원을 겸한다. 

 

그리고 임정 국무원 비서로 차리석 국무원 비서장과 함께 임정의 살림을 도맡아 하였다.

 

김의한은 귀국 후에도 옛 동지들과 함께 한독당 중앙상무위원으로 조국의 분단 극복을 위하여 활동한다.

 

또한 1948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열린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한독당 대표로 김구와 함께 참가한다.

 

김의한은 6.25전쟁 시기 민족자주연맹, 반민특위, 한독당, 제헌의원, 2대 국회의원 등과 함께 북한으로 간다. 이에 대해 김자동 선생은 이때 북한으로 간 인사 면면들을 볼 때, 당시 북한이 전쟁에 승리한 후 친일파를 청산하고 새로운 통일 정부를 구성할 때 함께하려고 ‘납치’가 아니라 ‘모시기 작전’으로 모셔간 것이 아닐까 하는 증언을 했다. 

 

물론 이 증언은 조소앙 선생 동생 조시원과 조소앙 선생 비서로 있으며 ‘모시기 작전’에 관여한 김흥곤으로부터 어머니장정화가 전해 들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6.25전쟁 때 ‘모시기 작전’으로 북한에 간 인사들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만들어 활동하는데 김의한도 위원으로 활동하다 1964년 타계하여 평양 재북 인사 묘역에 묻혀 있다.

 

 

어머니 수당(修堂) 정정화

 

어머니 정정화는 “시아버님인 김가진을 모시기” 위해 남편을 따라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갔지만 이후에는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그녀는 감시가 덜한 여성이라는 점을 활용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아서 중국과 국내를 오가면서 자금 모금책,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국내로 몇 차례 잠입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또한 중국 망명 27여 년 동안 자기 가족뿐 아니라 이동녕, 김구 등 임정 요인과 그 가족들을 돌보며 임정의 안 살림꾼으로 임정 요인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였다.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여 간부를 맡았고 1943년에는 대한애국부인회 훈련부장 등 여성 독립운동가로 활동한다.

 

그러나 해방 후 미군정의 홀대 속에 1946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고, 1951년 9월 6.25전쟁 중 ‘비상사태하의 특별조치령’ 위반 부역죄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이런 민족의 풍파 속에 여성의 몸으로 올곧게 감내해낸 회고록 『장강일기』(장정화, 학민사, 1998)를 토대로 연극 「장강일기」와 「치마」, 「아! 정정화」 등이 공연되기도 하였다.

 

 

김자동

 

선생은 1929년 10월 17일 김의한 선생과 정정화 선생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부모는 상하이 임정 초기부터 활동한 관계로 이동녕, 김구, 엄항섭 등 임정 요인들의 품에서 ‘임정의 아들’로 자랐다.

 

선생은 조선일보를 거쳐 1961년 2월 13일 4월혁명 공간에 탄생한 민족일보 기자였다. 

선생은 민족일보의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는 신문’이라는 사시(社是-회사 경영상의 주된 방침)에 동조하며 조용수 사장과 함께한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5월 19일, 민족일보가 강제 폐간되고 조용수 사장이 사형당하는 것을 겪으며 선생은 언론계를 떠난다.

 

선생은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해 『한국전쟁의 기원』, 『레닌의 회상』(크루프스카야, 일월서각, 1986), 『모택동 전기』 등을 번역해 출간했다.

 

선생은 2004년부터 필생의 업으로 여긴 임시정부 선양사업에 몰두해 20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을 건립이라는 결실을 이루었다.

 

[사진출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그리고 2018년 10월 1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된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출판기념회’를 잊을 수 없다.

 

선생은 당시 “올해 구순이어서 이 기회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촛불정부 탄생으로 내심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 기운이 모여 기쁘게 생각한다”라고 강조하며 기뻐하셨다.

 

당시 참가한 사람들은 과거 선생께서 “지금의 독립운동은 통일운동”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실현되는 그 날이 오고 있다고 여겼다.

 

존경하는 김자동 선생님!

 

내세울 만한 투쟁경력이 없다고 후진들에게 ‘항일 투쟁’에 헌신한 집안 어른과 임정 품 안에서 자란 이야기를 글로 써서 후대에 알려주신 선생님!

 

정말 후대에 좋은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지식 있는 지식으로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선생님은 지식으로 우리 조국 통일에 이바지하였습니다.

 

특히 박근혜의 엄혹한 눈초리를 무시하고 소위 ‘이석기 의원 내란 음모 사건’과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에 반대 운동에 함께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김자동 선생님!

 

조국은 기억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이름과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걸어온 길을!

광고
광고
광고
광고
URL 복사
x

PC버전

Copyright 자주시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