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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살210] 북한과 유엔을 대하는 미국의 관점 문제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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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환 기자
기사입력 2022-12-20

차례

1. 거듭된 유엔 안보리 회의 결렬에 발끈한 미국

2. 중러 탓하기의 불합리성

3. 드러난 미국의 속셈

4. 현실과 동떨어진 대국주의

5. 미국은 민심을 따라야

 


 

(이어서)

 

4. 현실과 동떨어진 대국주의

 

1) 미국의 대국주의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고 통제하지 않는 중국, 러시아를 비난하는 배경에는 강대국이 시키면 약소국은 따라야 한다는 대국주의가 있다. 이를 패권주의,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다. 

 

미국은 그동안 자신의 막강한 군사력과 달러 패권을 이용해 국제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특히 약소국에 대해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2004년 12월 21일 자 시사저널 기사 「‘제국주의’ 미국 앞에 거칠 것이 무엇이랴」는 이런 미국의 대국주의 행태를 자세히 소개했다. 

 

“미국은 또 오대양 육대주를 다섯 개의 군사 지역으로 나누고 각각 사령부를 세워 24시간 관할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중략… 이들(사령관)의 권한이 정치·외교·군사 부문을 포괄하고 있어 ‘현대판 총독’으로 통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패권주의가 기인하는 다섯 가지 철학) 중 핵심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대표되는 홉스주의 (즉) 세계에서 믿을 것은 힘이요, 미국의 이해를 지키는 데 다자주의나 국제기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이 약소국을 군사적으로 다룬 사례 중 하나인 1989년 파나마 침공을 살펴보자.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키운 인물인 파나마군 최고사령관 마누엘 노리에가는 점차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반미 정책을 폈고 이에 발끈한 미국이 1988년 노리에가를 마약 밀매 혐의로 기소해버렸다. 그리고 노리에가를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1989년 12월 20일 새벽 미군 2만 7천여 명을 투입해 정규군 1만 6,300명의 파나마를 짓밟았다. 결국 1990년 1월 3일 노리에가는 미 마약단속국 요원에게 체포되어 미국에 끌려가 재판받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 나라의 실권자이자 고위 관료를 기소하고 체포하겠다며 군대를 투입해 침공하는 주권 유린이 백주에 벌어진 것이다. 유엔 총회는 1989년 12월 29일 국제법을 ‘흉악하게’ 위반한 미국을 규탄하고 미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사회의 목소리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실 사례를 찾자면 멀리 지구 반대편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2018년 10월 10일(미국 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한국이 대북 제재를 완화할 것이라는 언론 보도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은 우리 ‘승인(approval)’ 없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 ‘승인’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 ‘승인’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명백한 내정간섭 발언이었다. 그것도 ‘승인’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자신이 결코 ‘실언’을 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했다. 한국은 미국의 ‘승인’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꼭두각시 나라라고 미국 대통령이 직접 선언한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라고 자부하는 한국도 미국에는 그저 약소국에 불과하며, 약소국은 강대국의 ‘승인’ 없이 아무것도 하면 안 되는 그런 나라라는 게 미국의 생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내정간섭 발언을 두고 한국의 청와대는 “모든 사안은 한미 사이에 공감과 협의가 있는 가운데 진행을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라고 반응한 것이다. 우리는 약소국이니 뭐든지 강대국인 미국의 ‘승인’을 받겠다고 알아서 무릎을 꿇은 셈이다. 아마 미국은 이 모습을 보며 ‘약소국은 강대국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자기 생각이 당연하다고 더욱 확신했을 것이다. 

 

민주당 바이든 정부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전임 트럼프 정부가 동맹국을 무시했다면 자기들은 동맹 관계 복원에 주력하겠다고 한다. 이 말을 해석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이 동맹국에 거친 말로 명령했다면 조 바이든 대통령은 동맹국에 부드러운 말로 명령하겠다는 소리다. 거칠든 부드럽든 미국이 시키는 걸 해야만 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에 와서 윤석열 대통령을 띄워주고 삼성, 현대 대기업 총수들을 띄워준 다음에 수십조 원의 투자를 받아냈다. 그러고는 미국에 돌아가 인플레이션 방지법을 만들어 한국의 뒤통수를 쳤다. 그 뒤로 윤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을 만나려고 나토 정상회의, 유엔 총회 등 국제회의마다 졸졸 따라다녔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윤 대통령을 무시하며 모욕하였다. 뜯을 만큼 뜯어냈으니 약소국 대통령 따위는 만나줄 필요도 없다는 식이다. 

 

▲ 바이든 대통령이 6월 29일(현지 시각) 나토 정상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보지 않고 악수하는 장면.     ©RTVE

 

이처럼 미국은 약소국이 말을 듣지 않으면 가차 없이 짓밟아버리는 데 익숙하다. 그러니 북한도 당연히 주변의 큰 나라인 중국이나 러시아가 시키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북한과 중국, 러시아 사이의 역사를 안다면 결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중국, 러시아의 부당한 간섭을 거절해온 북한

 

미국과는 다른 차원이지만 중국이나 소련(러시아) 역시 대국주의적 성향을 보여왔다. 북중·북러 관계의 역사를 보면 중국과 소련은 북한에 여러 차례 부당한 간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자주권을 절대적인 가치로 내세우며 중국과 소련의 간섭을 거부하여 왔다. 그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1956년 8월 종파사건

 

1950년대까지도 북한 정부와 노동당 내에는 소련이나 중국 같은 큰 나라를 따라야 한다는 세력이 적지 않았다. 대체로 해방 전에 소련공산당이나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었는데 흔히 이들을 소련파, 연안파라 불렀다. 이들은 소련, 중국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가려는 김일성 주석을 사사건건 반대하였다.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 주석은 연설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소련식이 좋으니 중국식이 좋으니 하지만 이제는 우리 식을 만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라며 소련, 중국 등 대국의 정책을 따라 하는 사대주의를 반대했다. 특히 소련의 반대 압력에도 ‘중공업을 우선 발전시키며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노선’을 관철하였다. 이에 사대주의를 추구하던 소련파, 연안파는 반대 목소리를 높이다 못해 소련, 중국을 찾아가 압력을 넣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연안파의 핵심 인물인 최창익 국가검열상은 1956년 6월 8일 이바노프 소련대사를 찾아가 노동당의 노선을 바꾸도록 소련공산당이 압력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다. 

 

1956년 8월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가 열리자 소련파, 연안파 간부들은 당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결탁했으며 김일성 주석을 비판하면서 일제히 들고 나섰다. 하지만 오히려 김일성 주석을 지지하던 다른 참가자들의 항의를 받고 쫓겨났으며 연안파 최창익과 소련파 박창옥은 당직 박탈, 연안파 윤공흠은 출당을 당했다. 또 많은 소련파, 연안파 인물들이 소련과 중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이를 ‘8월 종파사건’이라 부른다. 

 

이에 아나스타스 미코얀 소련 부수상과 펑더화이 중국 부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중소 공동대표단이 8월 종파사건을 조사하겠다며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에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종파주의 청산 작업을 멈추지 않았으며 한국전쟁을 계기로 들어와 있던 중국군을 철수시키는 등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북한 내 소련파와 연안파는 설 자리를 잃었고 이후 북한에서 소련식, 중국식을 따라 하자는 주장은 급격히 사라졌다. 

 

나중에 마오쩌둥 중국공산당 주석과 펑더화이 부총리는 8월 종파사건에 관해 내정간섭을 한 것을 두고 김일성 주석에게 여러 차례 사과했다. 

 

한편 1961년 북한이 중화학공업을 앞세운 7개년 계획을 시작하자 소련은 자신이 요구한 노선과 다르다며 전후 복구 지원을 중단해버렸다. 또 1962년에는 소련이 사회주의 경제를 통합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 가입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자립적 민족경제를 내세우며 거부하는 일도 있었다. 1964년 6월 16~23일 북한은 평양에서 제삼세계 국가를 포함한 34개국이 참여한 아세아 경제 토론회를 개최했다. 소련은 자립경제노선을 강조하는 이 토론회를 반대하였지만 북한은 강행하였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1968년 1월 23일 북한은 동해 영해를 침범한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단속하였다. 이에 미국은 핵항공모함 두 척을 포함해 대규모 무력을 한반도에 집결시켜 배와 승무원을 돌려달라고 압박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하라며 맞섰다. 전면전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은 소련을 압박했다. 북한이 소련 말은 들을 것으로 여긴 것이다. 

 

미국의 압력을 받은 소련 외무부는 미국의 사과를 기다리지 말고 즉시 배와 승무원을 돌려주라며 북한을 압박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했다. 

 

1968년 4월에 열린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은 당시 진행 중이던 북미 협상에 관해서 북한이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북한을 비난하고,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는 국제 기준으로 볼 때도 보기 드물게 가혹한 처사라고 하면서 북한의 행동을 비난하였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5)」, 미국의소리, 2009.11.2.)

 

당시 북한, 소련 사이의 유명한 일화도 있다. 하루는 소련 외무부 차관이 소련 주재 북한 대사를 호출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호출에도 북한 대사는 꿈쩍도 안 했다. 우리로 치면 미 국무부 차관이 호출했는데 미국 주재 한국 대사가 모른 척한 셈인데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아무튼 북한이 호출을 거부하자 화가 난 소련 외무부 차관이 직접 차를 몰고 북한 대사관을 찾아갔다. 그러자 북한은 최하위 외교관인 삼등 서기관을 내보냈다.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소련 관리라면 삼등 서기관이 상대하는 게 적당하다는 의미였다. (리영희, 『대화』, 한길사, 2005, 367~372쪽.)

 

당시 소련은 물론 동유럽 국가들까지 나서서 북한에 양보를 촉구했다. 자칫하면 미국의 핵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이 잘못했으니 미국의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입장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전쟁 위협도, 외교 압력도 통하지 않자 미국은 치욕을 무릅쓰고 북한의 요구 조건을 수용했다. 승무원이 석방되기 전날 밤 존슨 미 대통령은 방송에 출연해 “북한은 소련의 이빨이 안 들어가는 나라”라고 하소연했다. (리영희, 앞의 책, 367~372쪽.)

 

▲ 북한의 전리품이 된 푸에블로호.     

 

핵·미사일 개발

 

90년대 들어 한반도 핵문제가 불거졌고 2000년대에 와서는 북한이 핵보유를 공식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물론 중국, 러시아도 북한을 압박했다. 특히 중국의 방해는 상당히 집요했다. 중국 처지에서는 동아시아에 자기 외에 새로운 핵보유국이 탄생하면 그만큼 자기 영향력이 축소되며, 북한을 지렛대 삼아 미국과의 관계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던 것도 끝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유엔에서 미국 손을 들어주고 대북 제재에 동참해주면서 미국에 최혜국대우(MFN)를 받고 세계무역기구(WTO)에도 가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하면 미국에 중국의 가치는 사라지고 단순히 경쟁국 혹은 적국이 되고 만다. 실제로 2010년대 후반 북한이 되돌릴 수 없는 핵보유국으로 자리 잡은 뒤 미국은 중국에 무역전쟁을 걸고 대만을 부추겨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는 등 대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무튼 북한이 2006년 7월 5일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비롯해 7개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하자 7월 15일(현지 시각) 유엔 안보리가 만장일치로 대북 결의안 1695호를 채택했다. 어느 나라나 개발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을 오직 북한만은 개발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중국, 러시아도 동참했다. 

 

그해 9월 중국은 대북 원유 수출을 중단했다. 당시 북한은 원유 수입의 9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의 대북 원유 수출 중단은 상당히 강력한 대북 압박이 되었다. (「중국 중유공급 중단 압력으로 북한과 담판했나」, 한겨레, 2006.11.1.) 

 

이후에도 중국은 시시때때로 대북 원유 수출을 중단해 북한을 압박했다. 2014년에는 상반기 내내 원유 수출을 중단했는데 당시 일본 교도통신은 “중국이 북한에 원유 수출을 중단하면서 핵개발을 그만두거나 6자 회담에 복귀할 경우 수출을 재개할 수 있다는 조건을 걸었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중국의 압박은 북한을 움직이지 못했다. 채인택 논설위원은 「[심층연구] 북한·중국의 기묘한 애증사」(중앙일보, 2016.4.2.)에서 “북한은 호락호락 중국의 영향권에 머물지 않았다. 최근 북한의 대중국 경제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때문에 중국이 외교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북한에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북한의 대중 경제의존이 반드시 중국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북한 경제 자체가 대외 교역에 의존하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북한이 자립적 민족경제를 구축한 것이 중국의 경제 압박을 이겨내는 힘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에서 자주’를 내세우는 북한의 지도이념이다. 북한은 자국의 노선을 외부의 간섭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중국을 비롯한 어떤 나라가 압박한다고 해도 그동안 노선을 바꾸지 않아 왔다. 

 

이후에도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이 핵시험을 하거나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때마다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의 손을 들어주고 다양한 통로로 북한을 압박했다. 하지만 북한은 중국, 러시아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2017년 11월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이처럼 북한은 미국의 기대와 달리 강대국의 말을 듣고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다. 수십 년을 겪어보았다면 미국도 이제는 인정할 때가 되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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