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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제국의 고립과 반제자주노선의 부상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 67주년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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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기사입력 2023-07-26

오늘은 1956년 7월 26일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외세가 부당하게 차지해 온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다고 선언한 지 67주년이 되는 날이다.

 

▲ 1961년 시리아에서 연설하는 나세르.     

 

1960년대 세계 주요한 사건의 현장 활동가이자 반전운동가로 ‘뉴 레프트 리뷰’ 편집위원인 타리크 알리는 『1960년대 자서전』에서 수에즈 운하 사태를 대영제국의 몰락으로 보았다.

 

“1956년은 한 세대 전체에게 흔적을 남긴 해였다. 수에즈 사태는 한 시대의 종말을 상징했다. 한때 압도적인 제국주의 세력이었던 영국은 이제 독자적으로는 어떤 주도권도 행사할 수 없었다. 수에즈 동쪽에서건 서쪽에서건 어떤 행동을 취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사전 승인이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나세르의 정치적 성공으로 식민세계에서 중립주의는 잠재성 있는 세력이 되었다. …중략… 새로운 제삼세계 민족주의의 발흥은 그해의 가장 흥분되는 사건으로 보였다.”

 

1956년 이집트 정부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는 전후 세계 질서의 재편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1955년 반둥회의의 후속 조치”라고 평가받았다.

 

 

이집트가 아닌 영국의 수에즈 운하 통제

 

1869년 개통한 수에즈 운하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가장 중요한 해상로가 되었다. 또한 사람과 물자수송이 획기적으로 단축되었지만, 군대의 투입도 빨라 세계 인민이 식민 통치로 고통을 겪었다.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 차관에 의해 완공되었지만, 영국이 차관 주식을 매입하고 군대를 진주시키면서 운하 운영에 개입했다. 

 

2차 대전 이후 이집트는 주식을 일부 사들이고 수에즈 운하사와 협약을 체결하면서 운하 운영에 개입했지만, 최종적으론 영국이 운하를 통제하였다. 

 

▲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배들.     

 

하지만 1952년 7월 반영(英) 노선을 표방하는 나세르 대령이 이끌던 자유장교단이 혁명을 일으켜, 영국에 유화적이던 왕정을 폐지하고 이집트를 근대적 공화국으로 만든다. 

 

1956년 대통령에 취임한 나세르는 토지개혁을 추진하고, 나일강에 아스완 댐을 건설해 농업 생산을 증대하려고 했다. 

 

나세르는 제1세계 미국을 비롯한 서방으로부터 아스완 댐 건설비용을 조달하면서, 1956년에는 세계은행에서 아스완 댐 차관 2억 달러를 승인받았다. 그리고 제2세계인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에선 체코슬로바키아산 무기를 들여왔다. 

 

그러자 미국은 나세르를 제1세계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중근동(中近東)에서의 반공(反共) 조약인 바그다드조약에 가입하도록 압박했다. 그러나 나세르가 가입을 거부하자, 미국은 세계은행을 압박하여 차관 승인을 취소케 했다.

 

 

나세르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

 

이에 나세르는 1956년 7월 26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해방광장에서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했다.

 

“워싱턴을 떠도는 소문이 이집트는 미국의 원조를 보장받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고 말할 심산이라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마음껏 분노하시라. 하지만 당신들은 결코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폭정을 휘두르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갈 자유와 영광과 존엄의 길을 알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무력에도 달러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수입으로 아스완 댐을 건설하겠다고 말하고, 즉각 이집트군이 출동해 수에즈 운하를 점거했다.

 

그러자 구(舊)제국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을 부추겨 10월 29일 제2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은 국제사회에서 과거 제국주의적 행태로 인식되어, 동맹국인 미국조차 영국과 프랑스에 경고한다.

 

또한 소련이 이집트를 돕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암시함으로써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나세르는 일약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아랍 세계를 휩쓴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네루 총리, 저우언라이 총리, 티토 대통령, 김일성 주석과 함께 비동맹운동에서도 활약한다.

 

 

비동맹운동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동서 혹은 1세계와 2세계로 나뉜 냉전 질서가 형성된다.

 

‘비동맹운동’은 냉전 질서에 대한 제3세계의 대안이자 응답이었다.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고 중립 노선을 걷겠다는 ‘비동맹운동’은 신생 독립국 지도자들에게 대안으로 떠올랐다.

 

소련과 갈등을 겪다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는 1956년 7월 제3세계의 얄타회담이라 부르는 브리주니 회담에서 나세르, 네루와 함께 1955년 반둥회의 성과를 논하고 비동맹을 구상한다.

 

브리주니 회담의 설명문에는 “공포와 걱정이 세계를 지배하는 한 평화를 위한 단단한 토대는 만들어질 수 없다. 동시에 이런 공포와 걱정을 금방 없앨 수는 없으므로 점진적인 단계를 밟아야 한다”라고 나온다. 

 

그리고 양 진영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신생국들이 1961년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모여 첫 비동맹 정상회의를 하였다. 

 

21개 참가국은 세계정세에 우려를 표하며 무장해제, 핵무기 실험의 중단, 냉전 거부와 평화공존, 유엔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비동맹운동 회원국 자격에 대하여 “외국 군대나 기지가 주둔하는 나라나 강대국의 동맹국은 가입할 수 없다”라는 분명한 원칙을 세운다. 이제 비동맹은 반둥회의의 아시아, 아프리카를 넘어서서 동서로 양분된 상황에서 국제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1965년 10월에 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사건으로 수카르노가 실각하면서, 2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는 열리지 못했다.

 

 

삼대륙 회의와 라틴아메리카 반제자주노선의 부상

 

1966년 1월 쿠바 아바나에서 3대륙의 혁명적 운동이 한자리에 모여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인민 연대회의(삼대륙 회의)를 개최한다. 반둥에서 시작된 반식민 반제국주의 운동이 전 세계로 확장한 것이다.

 

삼대륙 회의는 반둥회의와 비동맹운동의 연장선에 있지만, 3대륙 전체의 민족해방 성향의 정권과 운동에는 견해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삼대륙 회의는 평화와 사회주의를 목표로 설정하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장 투쟁은 물론 의료, 경제, 문화 등 전 분야를 사용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1965년 2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인 알제리 회의가 무산되고, 중국과 인도의 국경 분쟁으로 인한 무력 충돌 그리고 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로 반둥회의 평화원칙이 무너지면서 이후 삼대륙 회의도 열리지 못한다.

 

하지만 회의가 열렸던 라틴아메리카에서 다시 핑크 타이드 혁명의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대리전으로 고립되어 있고, 핑크 타이드로 라틴아메리카 지배력은 급속하게 쇠퇴하고 있다.

 

마치 67년 전 나세르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 정국을 보는 듯하다.

 

라틴아메리카 나라 중 에콰도르, 콜롬비아, 페루, 볼리비아, 칠레 등에서 원주민 인디오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는 제국주의의 야만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야만, 그리고 나아가 서구 문명의 야만을 고발하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대륙에는 21세기 국가 체제 대안으로 여러 가지를 모색하고 있다.

 

현재 사회주의 정권이 다수 존재하고 또 늘어나고 있다. 쿠바가 그 선두에 있고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볼리비아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서구 좌파는 이미 혁명성을 상실했다. 

 

라틴아메리카는 반둥회의와 비동맹운동 그리고 삼대륙 회의의 연장선으로 세계혁명의 진앙이 될 것이다.

 

인류 역사는 전진하고 진보한다.

새 나라를 만들자!

 

해방공간 김기림 시인의 「새나라 송」 일부다.

 

녹슬은 궤도에 우리들의 기관차 달리자

전쟁에 해어진 화차와 트럭에

벽돌을 싣자 세멘을 올리자

애매한 지배와 굴욕이 좀먹던 부락과 나루에

새나라 굳은 터 다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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