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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서] 죽음 앞에서 당당했던 여성 빨치산 지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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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기사입력 2023-10-04

20세기는 혁명의 시대였다.

 

그중에서 여성 혁명은 참정권 쟁취와 확대라는 결과도 있지만, 무엇보다 여성을 연대의 대상, 자주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으로 여겼던 사고를 바뀌게 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사는 여성에게 여성 해방의 문제는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독립운동, 해방공간에서는 민족 통일운동,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는 미 제국에서 벗어나는 민족해방 문제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에서 남성과 똑같이 항일 독립투쟁에, 반미투쟁에 나선 여성 독립군과 빨치산 그리고 혁명가들이 이름 모를 산하에 뜨거운 피를 흘린 것을 민중은 알고 있다.

 

오늘날 여성들은 조국의 통일과 자주적 정권 수립만이 여성 해방의 첫 단계라고 여기고 민중 세상에서 제 자리를 차지할 준비를 쉬지 않고 하고 있다. 

 

지금은 자주와 반미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이다. 

 

이 글은 20세기 혁명의 시대에 중국에서 미중전쟁(중국 국공내전)과 한반도에서 북미전쟁에 여성의 몸으로 조국 통일과 미 제국 축출을 위해 싸웠던 지춘란이란 여성을 조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지춘란 조명에 증언과 자료 제공을 해 주신 부군 황금수 선생과 남도부(제3지대 사령관) 유품 발굴에 참여하여 ‘비장 문건’과 남도부 부대 기관지 『붉은별』 등 자료 제공 그리고 남도부, 빨치산에 대한 자료와 조언을 해 주신 임경석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빨치산 지춘란 간호장의 당 보고 임무

 

지춘란은 1931년 중국 용정 출생으로 1947년 3월 25일 길림성에서 중국인민해방군 제72단 전사 위생원으로 입대하였다가 중국 국공내전에 참가한다.

 

그리고 중국인민해방군 부상병 치료 활동으로 1949년 양사(소위)로 승진하여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리고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남 유격대인 남도부 산하 간호장으로 편입되어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1954년 1월 20일 대구 팔공산 아지트에서 체포되어, 국내법인 국방경비법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1960년 4.19혁명으로 형량이 감형되어 1968년경 출소한다.

 

지춘란은 출소 후 옥살이를 함께한 4월 혁명 공간의 사회대중당 최만리 여성위원장의 소개로 사회당 황금수 선생을 만나 결혼한다.

 

부군 황금수는 해방공간 1948년과 1961년 5.16쿠데타로 2번 체포된다. 그리고 1950년, 1974년, 1979년 3번 구속된다.

 

황금수는 아내 지춘란으로부터 생전에 제3지대 사령관 남도부가 하산을 결정하기 전부터 일관되게 간호장으로 활동한 지춘란에게 당 하산 임무를 말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황금수는 “자기들이 살아온 모든 것을 네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으면 3지대가 어떻게 싸웠다는 것을 증언해 달라고 부탁하였다”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지춘란은 보고할 의무가 있다고 자기에게 늘 이야기했다고 한다.

 

또 체포 후 남도부는 지춘란에게 “너는 간호장이고 조선반도[한반도]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조선인민군 출신도 아닌 팔로군 출신이기 때문에 이놈들이 함부로 사형 선고하지 않을 것이다.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남아서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해 달라. 살아 나가면 제3지대가 어떻게 싸워 왔던 것을 증언해 달라”라고 말했다고 황금수는 말했다.

 

아마 남도부는 이미 사형집행을 당할 것이라는 예견을 하고 지춘란에게 말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부군은 증언했다.

 

지춘란은 빨치산 투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어 아이를 입양하여 키운다. 이후 부군 황금수가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자 옥바라지와 아들 원을 키우다 1984년 의문사 당한다.

 

 

남도부 ‘비장 문건’ 발굴

 

남도부는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체결 이후 하산하여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동 창녕 성씨 고택에서 ‘비장 문건’을 작성하고 ‘1953년 10월 10일’이란 날짜를 적어 유리병에 넣어 땅에 묻었다.

 

그리고 48년이 지난 2001년 10월 21일, 남도부 빨치산 생존자 성일기와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팀이 이 유리병을 발굴했다. 당초 남도부가 항아리에 넣었다고 알려져 왔지만, 실제는 항아리가 아닌 유리병이었다. 

 

남도부의 유품인 유리병에서는 손잡이를 잘라낸 몽당숟가락과 신문지에 쌓인 ‘비장 문건’ 수첩 그리고 남도부 부대 기관지 『붉은별』과 ‘증명서’, ‘원호증’ 등이 나왔다.

 

▲ 원호증.     © 한찬욱

 

『붉은별』은 남도부 부대 기관지로 2면짜리 등사판 신문 제44호(1953. 2. 8), 제46호(1953. 6. 25), 제47호(1953. 8. 15)였다.

 

발굴에 참가한 임경석 교수는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2008)에서 ‘비장 문건’에 대해 소상히 이야기했다.

 

“노트는 가로 15㎝, 세로 19㎝ 크기의 자그만 것이었다. 두께도 20쪽이 넘지 않았다. 속지에는 아무런 양식도 인쇄되어 있지 않은, 어디서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공책이었다. …중략… 남도부는 노트 표지에 ‘비장 문건’이라고 적었다. 사람들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극비 서류인데도 ‘비밀스럽게 숨겨두는 문서’라고 굳이 써넣었다. 남도부는 이 보고서가 상급 당 기관에 곧바로 전달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지금은 비록 사세가 불리하지만 언젠가 때가 오면 숨겨둔 이 문서를 조선노동당 중앙기관에 전달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그 사람의 생각이었다.”

 

‘비장 문건’ 속표지에는 “이 서류의 보관자에 대하여서는 당의 영광스러운 배려가 계실 것을 건의함”이라고 쓰여 있다.

 

비록 지춘란은 빨치산 당 보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의문사 당하지만, 다행히 남도부가 남긴 ‘비장 문건’이 발굴됨으로써 제3지대의 활동은 공개 보고된다.

 

 

‘비장 문건’의 신상필벌

 

조직의 힘은 조직의 통일성에서 나온다. 조직의 통일성은 조직 내의 ‘비와 자비(비판과 자기비판)’를 통한 오류의 극복과 올바른 입장의 정립으로부터 나온다.

 

남도부는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비와 자비 못지않게 상벌에 역점을 둔다.

 

“빨치산 투쟁에 헌신적으로 참가해 온 현 생존자들은, 그가 보기에는 혁명과 당의 보물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을 가리켜 ‘여하한 난관과 애로에 부닥치더라도 조금도 동요 없이 당을 위하여 충실히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는 동무들’이라고 표현했다. 남도부는 그에 해당하는 인물 17명의 이름을 낱낱이 적었다. 보고서만이 아니었다. 제3지대 기관지 『붉은별』 제47호는 휴전 이후인 1953년 8월 15일에 발간된, 사실상의 종간호였다. 거기에도 빨치산 유공자에 대한 표창 상신서가 게재되어 있다. 표창 종류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가 표창 대상자를 추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3지대 표창을 직접 수여하는 것이었다. …중략… 포상 추천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남도부는 ‘변절자’들에 대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보고서 속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적들의 발악으로 인하여 불행히 생포된 분자들과 위축된 분자들이 투항하여 적의 기만적 회유에 빠져 동지들을 팔아먹고 적의 앞잡이의 역할을 놀고 있다.”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중)

 

▲ 1953년 10월 1일 생존자 명단.     © 한찬욱

 

▲ 1953년 10월 1일 생존자 명단.     © 한찬욱

 

▲ 『붉은별』 제47호.     © 한찬욱

 

지춘란은 남도부로부터 ‘여하한 난관과 애로에 부닥치더라도 조금도 동요 없이 당을 위하여 충실히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는 동무’라고 평가받았다.

 

 

죽음 앞에서 당당했던 여성 빨치산 지춘란

 

지춘란은 체포 후 중앙고등군법회의 주관하에 1954년 10월 12일부터 16일까지 4회에 걸쳐 동료 4인과 법정에 섰다.

 

“지춘란의 진술 태도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전투 요원이 아니라 간호장교임을 강조했다. 적십자 요원이므로 즉시 이북으로 송환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정당한 길을 걸어왔다’라고 소회를 밝혔다.”(『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중)

 

1954년 10월 16일 하준수(남도부)·유웅재·지춘란 3인은 사형, 문일준은 무기징역, 이원량은 징역 20년의 형을 언도받는다.

 

▲ 당시 재판 결과를 보도한 신문.     © 한찬욱

 

특히 지춘란의 판결문에는 ‘체포된 후에도 추호도 개준한 바 없이 법정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한다고 망언하는 광신적 공산주의자이므로 정상 참작할 바 없으며 따라서 사형 언도는 적법 타당하다’고 적시되어 있다. 

 

▲ 판결문.     © 한찬욱

 

▲ 판결문.     © 한찬욱

  

부군 황금수는 “자기는 법정에서 최후 진술에 나를 죽이려면 죽여라. 나는 내가 인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는 국제적십자 요원에 해당된다. 베트남 정전 회담 때 베트남 호찌민 동지는 불란서[프랑스] 간호장교를 즉석에서 석방을 시키고 돌려보낸 그런 역사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돌아가겠다, 돌려보내라 하는 최후 진술을 했다”라고 지춘란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후 계속 연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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