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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민족해방과 자주평화통일에 몸 바친 혁명가 이재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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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기사입력 2023-10-08

 © 추모연대

 

10월 7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통일열사 이재문 42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 추모제’가 개최되었다.

 

1976년 2월 29일 박정희 군사파쇼 정권에 맞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을 발기한 김병권, 이재문, 신향식 선생의 묘소가 그동안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것을 2019년 3월 30일 마석 모란공원으로 이장했다.

 

그리고 중앙위원 중 한 분인 이해경 선생의 묘소도 이장되면서, 이제 남은 분은 안재구 선생뿐이다.

 

이 모든 이장에는 지난 9월 17일 숙환으로 운명한 안경자 여사의 동지애와 통 큰 후원이 컸다.

 

또한 생존 남민전 동지들의 동지애는 43년 만인 2011년 11월 20일에 발기 3인과 먼저 간 동지 그리고 통일열사 이재문 40주기 합동 추모제를 공개적으로 거행하면서, 열사들의 숭고한 신념과 자주, 민주, 통일 정신을 기렸다. 

 

아울러 매년 10월 초가 되면 여러 단체와 합동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경북대학교 민주동문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사월혁명회, 서울대학교 민주동문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한국진보연대가 후원하고 남민전동지회가 합동 추모제를 주최하였다.

 

이날 이재문 선생 묘소 앞에서 합동 추모제를 진행하기 전에 추모제 참가자들은 모란공원 열사 묘역 위쪽에 있는 박석률 동지, 김희상 동지, 김충희 동지, 김병권 동지, 이해경 동지, 신향식 동지의 묘소 등을 순서대로 참배했다.

 

 © 추모연대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시대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의 패망은 박정희의 ‘10월 유신’ 영구집권을 위한 결정적 구실을 주었다. 연일 북한의 남침 규탄 대회를 개최하면서 이 분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해 민주화 시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다.

 

1974년 1월 8일에 긴급조치 1호를 시작으로 모든 긴급조치의 결정판이자 산천초목이 떠는 법률인 긴급조치 9호가 1975년 5월 13일 공표되었다.

 

긴급조치 9호는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하고 일체의 유언비어 날조 및 헌법 비방 행위의 금지, 학생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한 제3의 쿠데타이자 민주정치를 박살 내는 핵폭탄급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거의 5년, 날수는 1천6백69일(4년 6개월)이나 지속하면서 8백여 명의 구속자를 낳는 공안 탄압의 대기록을 세웠다.

 

긴급조치 9호의 대상은 물론 대학이었다.

 

1975년 이후의 교내 시위는 학교 곳곳의 경찰의 감시 눈초리로 대개 10분 이내에 끝났다. 짧으면 몇십 초, 잘해야 5분을 넘기기 어려운 시위다운 시위를 하지 못하고 무지막지하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민주통일 인사들에게는 소위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만들어 북과 연계시켜 처형하고, 장기 옥살이를 시키는 등 너무도 엄혹한 상황이었다.

 

 

박정희 유신군사독재 정권의 최후 발악과 남민전 운동

 

유신군사독재 정권의 말기적 상황은 박정희 일인 지배 체재가 강고해, 통상적 방법으로 도저히 박정희 파쇼독재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특히 대학의 산발적 데모, 그리고 명망가나 지식인 중심의 평화적 시위, 유인물을 만들어 살포하는 민주화 운동으로는 더욱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6.3한일협정반대 투쟁 당시 최초로 화염병이 나왔지만, 남민전은 그것 이상의 무장투쟁까지 준비해야 했다.

 

남민전은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몸을 희생하는 그야말로 해방공간의 투쟁처럼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예비군훈련장 무기 획득과 학교, 버스정류장, 건물 옥상에서의 삐라 살포 그리고 투쟁 자금 조달을 위해 보석상과 당시 민중의 공분 대상 중 하나인 악덕 기업 동아건설 회장 자택 강탈 등 남민전의 반유신 투쟁은 민중들에게 오히려 희망을 주었다.

 

이유는 소위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국가가 살인하는 박정희 유신체제를, 평화적인 시위나 유인물 몇 장으로는 끌어내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1979년 8월 남민전 산하 조직인 민주구국학생연맹은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진압과 이 과정에서 사망한 김경숙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횃불 투쟁’으로 명명된 유인물을 배포하는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도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10월 4일 김영삼의 제명 결의안이 통과되던 엄중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그해 10월 9일, 16일 그리고 박정희 암살 후 11월 13일에 남민전 사건을 발표하면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로서 폭력에 의해 적화통일을 기도해 온 대규모 반국가 조직체’, ‘자생적 공산혁명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84명을 검거한다.

 

 

민전과 민자통 이후 최대 전선 조직 남민전

 

남민전은 해방공간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과 4월혁명 공간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이후의 최대 전선 조직이었다.

 

남민전을 발기했던 당시 세분 선생의 걸어온 길은 인혁당, 남조선해방전략당(전략당), 통일혁명당(통혁당) 차이가 있지만, 이것을 남민전으로 통합하여 박정희 군사파쇼 정권 타도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한 것이다.

 

중덕(中德) 이재문(李在汶) 선생은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여 4월혁명 공간에는 통일민주청년동맹 활동과 민족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됐지만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구·경북지부 활동과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지만 1차, 2차 인혁당에 연루가 된 상태였다.

 

김병권(金秉權) 선생은 대구에서 출생하여 해방공간에는 대구 대중일보 기자로, 4월혁명 공간에는 사회당 경북도당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1968년 전략당 사건에 연루돼 징역을 살고 나와 1975년 사회안전법 신고를 거부하며 수배 중이었다.

 

신향식(申香植) 선생은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졸업 후, 1965년 동아출판사 제작부에 취업하여 임금 투쟁과 노조결성 그리고 학사주점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1972년 만기출소 후, 1975년 사회안전법 발효에 맞서 신고를 거부하며 지하투쟁에 돌입하였다.

 

세분 선생은 비밀 유지를 위해 1976년 2월 29일. 4년마다 한 번 2월에 29일을 두어 하루를 늘리는 윤년에 남민전을 발기한다. 비록 발기인은 셋밖에 안 되지만, 과거의 어떤 운동보다 각계각층이 결합하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남민전 강령 제1조는 “미일을 비롯한 국제제국주의의 일체의 식민지 체제와 그들의 앞잡이인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을 수립한다”라고 되어 있다.

 

즉 당시 남민전이 지향하는 것은 이 땅을 억누르고 있는 제국주의가 기본척결 대상이고 그다음에 그를 대리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를 새롭게 수립하는 것을 목적 의식적으로 하는 전선운동이었다.

 

민족해방과 자주평화통일에 몸 바친 혁명가 이재문 선생

 

▲ 이재문 선생. [사진제공-한찬욱]  

이재문 선생은 남민전의 서기로 혁명 조직 운동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는 분이었다.

 

그리고 지도자로서 모든 운동에 앞장서서 실천하고 조직하며 지도하여 후배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또한 세계 혁명사와 한국 혁명사를 꿰뚫고 있는 탁월한 이론가였다. 그리고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비사를 많이 알고 있어 전술에 많이 응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반동의 음모에 암살되는 미국 케네디 대통령 예이지만, 역으로 제국의 앞잡이 박정희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 사례를 연구하며 실행 계획을 세우려고 한 것으로 전해온다. 

 

당시 미국 대통령 경호처가 모든 가능한 위협에 대비해 철통같은 신변 보호와 보안 예방책을 취하고 있었지만, 결국 케네디가 암살당한 것처럼 보안 허점은 분명히 있다고 사례를 연구했다는 전설 같은 소문도 있다.

 

이재문 선생은 ‘민족해방과 자주평화통일에 몸 바친 혁명가 이재문 열사’로 쓰인 묘비명과 같이 불꽃처럼 싸우다, 치안본부의 악랄한 고문과 안기부 공작 때문에 적십자회 병원에 나왔다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 옥사(사형집행 전인 1981년 11월 22일)한다.

 

그러나 지난해 8월 25일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서울구치소 수감 중 의문사 당한 ‘이재문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진화위는 “법무부가 수형자에 대한 관리책임을 방기하고 안기부는 사형이 확정된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외부진료를 불허해 이재문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사망에 이르게 된 것으로 판단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진화위는 ‘△수사기관(치안본부)이 이재문에게 고문과 가혹행위를 가한 점 △수형자에 대한 관리책임을 지닌 법무부가 이재문에게 적절한 치료를 받도록 조치하지 않은 점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이재문이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외부진료를 불허한 점 △이로 인해 이재문이 국가가 관리하는 수형 시설 내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가운데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 점’에 대해 국가가 이재문 씨와 그 가족들에게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남민전 동지인 고 김남주 시인의 「전사 1」로 이재문 선생 추모 결의를 대신한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 엄수가 규율 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 분 일 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 몸처럼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에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 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가리지 않고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침착 기민하게 처리해 나갔으며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진격의 나팔소리 드높아지고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적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을 닮았다.

그리고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의 준비에 착수했으며

그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자신을 잊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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