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1월 18일은 이창기 기자의 5주기입니다. 이창기 기자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보내온 추모 글과 시를 소개합니다. 아홉 번째는 이희철 씨의 글입니다. (편집자 주)
![]() ▲ 이창기 기자. |
‘우리 동상~’하시던 우리 형님, 이창기 선배님을 떠올리며
이창기 선배님과의 첫 만남은 1998년 7월이었습니다.
대학생 시절 조선대학교 교정에서 광주·전남 지역 대학생,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한총련) 수배자들이 모여 여름 배움학교를 했습니다. 이창기 선배님은 이때 철학 강사 ‘홍치산’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이창기 선배님이 걸어온 학생 운동의 길을 듣고, 배우는 자리였습니다. 서울 사람답지 않은 까무잡잡한 얼굴에 강의할 때는 열정적으로 이글거리던 선배님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두 번째 만남은 2000년이었습니다.
이창기 선배님은 자주민보 기자로, 저는 한총련 의장으로 인터뷰를 하기 위한 만남이었습니다. 당시 수배 중이던 저를 위해 검은색 자가용을 몰고 온 이창기 선배님은 ‘007작전’을 방불케하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창기 선배님은 자가용으로 한참을 돌고 돌아 ‘00시 00분’에 안전한 식당으로 저를 데려가더니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책으로 발행하던 자주민보에는 어김없이 한총련의 소식이 실렸습니다. 그때는 한총련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심했던지 다른 언론사에서는 일부러 한총련 소식을 감추거나 거짓으로 꾸미기 일쑤였습니다. 이창기 선배님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정의롭고 애국적인 한총련 활동 소식을 자주민보 책 한 권에 가득 담곤 했습니다. 한총련 학생들과 진보적인 국민들은 자주민보를 보면서 올바른 정보를 얻었고, 한총련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어둠을 뚫은 곧은 빛처럼, 자주민보와 이창기 선배님은 한총련 대학생들의 활동을 지켜주고, 널리 알려준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세 번째 만남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특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주 만났기 때문에 가늠하기 어려워서입니다. 10년이 가까운 수배 생활 중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이창기 선배님이었습니다. 수배 생활 중 정기적인 활동비 마련이 필요했습니다. 이창기 선배님에게 말씀드렸더니 기꺼이 자주민보 후원계좌 중 하나를 열어 후원금을 모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당시에는 특히 국가보안법을 어긴 수배자를 보호하거나 도움을 준 사람은 부모, 형제라도 잡혀가거나 탄압을 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창기 선배님과 이런 관계이다 보니 수배 중에도 몰래몰래 만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지갑에서 있는 돈을 꺼내 마구잡이로 손에 쥐여주곤 했습니다. 언젠가는 외국에 다녀온 뒤 남은 100달러짜리 지폐가 한 장밖에 없다며 손에 쥐여주신 적도 있습니다. 항상 만나면 후배들을 위해 뭐라도 더 해줄 게 없는지 가방과 지갑을 뒤지곤 하던 정 깊은 이창기 선배님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이창기 선배님과의 만남 중 감옥에서의 만남도 인상 깊었습니다.
이창기 선배님은 2009년 광주교도소에 갇혀 있던 저를 자주 찾아와 면회하곤 했습니다. 그때 감옥에서 글을 보내 자주민보에 싣곤 했는데 이창기 선배님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장문의 최후진술문도 자주민보 기사에 실어 많은 분께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창기 선배님이 보내준 편지는 애국심을 굳게 다질 수 있는 내용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2013년에는 이창기 선배님과 비슷한 시기에 서울구치소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같은 감옥 안이지만 서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때도 각자의 수감 번호로 편지를 주고받곤 했습니다. 1분만 걸으면 만날 수 있는 공간에서 편지는 일주일이나 걸렸습니다.
그러다가 감옥 안에서 감동적인 만남도 이뤄졌습니다. 감옥이 워낙 감시와 통제가 심한 곳이라 감옥 안에서 둘이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창기 선배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창기 선배님은 면회를 오는 분들에게 부탁해 같은 시간에 저와 동시에 면회를 신청하게 부탁해 뒀습니다. 그러면 비슷한 시간에 수감자 대기실에서 다른 칸에서 잠깐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창기 선배님과 저는 스치듯 만나 두 손을 굳게 붙잡고 헤어지곤 했습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맞잡은 두 손과 눈빛으로 전해지는 동지의 정과 애국의 마음을 주고받기엔 충분했습니다.
“우리 희철 동상~” 전남 목포가 고향인 이창기 선배님은 만날 때마다 늘 전라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담아 저를 이렇게 부르곤 했습니다.
누구보다 뜨겁게 조국을 사랑했던 애국자 이창기 선배님,
누구보다 정 많고, 의리 깊은 참된 인간 이창기 선배님,
글에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온전히 형님을 추억하고, 앞으로 형님처럼 굳건하고 애국심이 강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다짐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형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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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간: 11월 17일까지
◆ 추모위원비: 2만 원 이상 (계좌: 우리은행 1002-240-084597 예금주-김영란)
◆ 추모위원 가입 링크: https://bit.ly/이창기추모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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