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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중미 대결의 역사와 대만 그리고 중국의 완전한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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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기사입력 2024-01-08

갑진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전 지구적으로 선거가 많은 해이다.

 

우리의 안보와 경제 이해가 직결되는 선거로는, 대만 총통선거(1월 13일)와 러시아 대선(3월 15~17일) 그리고 미국 대통령 선거(11월 5일)가 있다.

 

그리고 브릭스 회원국인 인도의 총선도 4~5월에 걸쳐 있다.

 

우리 또한 4월 10일, 친일·종미·매국·반민족 윤석열 정권 심판과 진보정당 교두보 확보를 위한 22대 총선이 있다.

 

우선 첫 선거는 양안 관계뿐 아니라 중미관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대만 총통선거이다.

 

▲ 1940년 일본 제국의 확장을 보여주는 지도. [출처: 위키백과] 

 

 

신해혁명과 청 왕조 붕괴 그리고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 창당

 

중국은 1689년 청나라 강희제 때 서양 국가 러시아와 최초로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정리한다.

 

또한, 1700년대에 건륭제는 서역을 점령하며 이름을 ‘새로운 영토’라는 뜻인 신강(新講)으로, 또한 신장과 맞닿아 있는 티베트도 안정시키며 내륙 영토를 확정했다. 그리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국토완정의 핵심인 대만을 푸젠성에 병합시켰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중국 국토는 건륭제 때 완성됐다.

 

그러나 청나라는 영국에 의한 아편전쟁과, 내부의 농민운동인 태평천국운동으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 특히 청일전쟁의 패배로 중국을 근대국가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변법자강론’이 제창되지만, 서태후(西太后)와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한다.

 

하지만 쑨원이 민족·민권·민생의 실현을 위한 ‘삼민주의’을 내세우고 청 왕조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한다. 그리고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결성되고 청 왕조는 붕괴한다.

 

▲ 1911년 신해혁명 당시 상하이 시내.(난징동로) [출처: 위키백과]  

 

1917년 러시아혁명과 코민테른의 지원 그리고 5·4운동 성공 영향으로 중국공산당이 1921년 7월 23일 창당된다.

 

1929년 세계공황을 전후로 금융 불황과 혼란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과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즘 그리고 일본의 군부 세력은 추축국(樞軸國)을 만들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급기야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실로 중국 침략전쟁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항일전쟁에 나서야 하는 장제스와 국민당군은 오히려 ‘우선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 외부의 우환인 일본 문제에 대응하자(安內攘外)’라는 인민에 반하는 정책을 채택하고 중국공산당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중국공산당은 1934년 가을 근거지 이동을 결정하고, 북상항일(北上抗日)의 기치를 걸고 무려 1년여 동안 1만 2,500킬로미터를 이동하여 옌안에 도착한다. 그러나 주력 중앙과 1방면군의 대병력 8만 6,000 명이 옌안에 다다랐을 때는 많은 수가 장렬히 전사했고 남은 군인은 3만 명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큰 희생을 치르며 장정(長征) 도중에 뿌린 혁명의 씨앗들이, 결국은 일본을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시키고 마지막엔 미국도 몰아내는 대장정(大長征)을 한다.

 

특히 대장정 도중 1935년 1월 ‘준의 회의’에서 처음으로 마오쩌둥이 공산당을 영도(領導)하면서 국공합작을 이루어, 연합국과 함께 중일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한다. 

 

 

미국의 반소·반공 기지 중국 교두보 확보 음모 실패

 

미국은 1937년 중일전쟁 때부터 중국에 깊숙이 개입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1945년 8월 말부터 10월까지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3차 국공회담을 유도해, 중화민국 통일국가를 만들어 반소·반공 기지로 이용하려고 한다.

 

과거 1924년 제1차,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은 항일 전선이었다. 이에 반해 3차 국공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인 소련을 공산 적국으로 간주하고, 미국은 이에 대항하는 냉전 전선 구축을 시도한다. 함께 연합하여 독일과 일본에 싸웠던 미국과 소련이 동지에서 서로 적으로 돌변하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1945년 10월 10일 국공회담에서 미국의 의도대로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통일국가 건설에 합의하는 ‘쌍십회담기요(雙十會談紀要)’를 발표한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통치하는 지방 정권과 인민해방군 등에 대한 처리 방법, 일본이 지배한 동북지구의 행정·군사 등의 접수 문제를 둘러싸고 국민당과의 대립이 격화된다. 그러다 장제스는 과거 1927년 1차 국공내전처럼, 결국 중국 인민의 통일 열망을 저버리고 형제에게 총질하는 내전을 일으킨다.

 

미국은 이미 중국을 아시아의 반소 전초 기지로 만들기 위해 일제 패망 전부터 장제스에게 군사원조와 지지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군은 마오쩌둥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을 선점하기 위해 장제스 국민군을 수송하여 중국 각지에 배치하였다.

 

또한, 미국 의회는 피트먼법을 통과시켜 중국의 은을 미국의 금과 바꾸는 것을 허용했다. 장제스는 이 법을 통하여 필요한 군수물자를 살 수 있는 화폐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1945년 8월 14일 장제스는 소련과도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며, 소련에게 중국공산당을 지원하지 말고 중국에 대한  원조는 국민당 정부에 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공산당은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진주와 접수가, 장제스 국민당 군과의 충돌로 이어져 내전이 불가피하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한, 1945년 8월 15일 미·영·소 앞으로 보내는 각서에서 국민정부를 ‘국민당 정부’로 부르면서 공산당은 국민정부를 중국의 정통 정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중국공농홍군을 중국인민해방군으로 개칭했다.

 

 

마오쩌둥, 중국인민해방전쟁에서 미제국의 대리인 장제스와의 혈전에서 승리하다

 

1946년 6월 26일 중국인민해방전쟁(국공내전)이 시작된다. 

 

당시 양측의 전력은 지배하고 있던 인구수, 토지 면적, 도시 수, 군 병력, 무기 등을 대략 계산했을 때 국민당이 공산당의 4배 우세였다. 국민당은 1947년 3월 옌안을 점령했고 장제스는 1948년 설날에 발표한 연두사에서 “1년 이내에 공비를 일소하겠다”라고 호언장담한다. 이런 장제스의 호언장담 뒤에는 미국이 깊숙이 개입하고 영국과 프랑스도 지원하고 있었다.

 

국공내전 초기 전세는 국민당에 유리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승리는 내전 시작 후 1년 정도가 전부였다. 국민당군은 일본군과 똑같은 전술인, 점(도시)과 선(철도)만을 공략했고, 반면 중국인민해방군은 시간이 지나면서 농촌 지역의 지지를 바탕으로 점과 선을 포위했다.

 

마침내 중국공산당은 1949년 인민해방전쟁에서 승리하여, 10월 1일 톈안먼의 망루에서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와 여러 정치 세력의 대표자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패배한 장제스는 군대 50만 명과 지지자들을 이끌고 대만으로 탈출한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1954년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군사와·경제 지원을 한다.

 

대만은 일본의 침략 이후 영욕(榮辱)의 역사를 겪었다.

 

대만은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에 할양되나, 2차 세계대전 후 중국에 다시 복속된다. 그런데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 마오쩌둥과 인민해방군이 승리했다. 국민당 장제스와 국부군은 중국 본토에서 대만(中華民國)으로 쫓겨 갔는데, 이 사람들이 대만 원주민들을 차별해 갈등이 심각했다.

 

결국, 1947년 2월 28일 담배를 팔던 한 여성이 단속반원에게 폭행당한 사건에 분노한 대만 원주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 국민당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3만여 명이 학살당한다. 이를 2.28 대만 학살 사건이라 부른다.

 

 

항미원조전쟁 참전과 중국의 부상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국제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전쟁에 적극 개입했다. 또한,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하고, ‘대만해협 중립화’를 내걸며 중국의 대만 무력해방을 봉쇄한다. 

 

중국은 6월 28일과 7월 6일 등에 저우언라이 총리 겸 외상 명의로 미국의 ‘6·25전쟁 개입의 불법성’과 ‘대만으로 함대 파견의 침략성’을 규탄한다.

 

그러나 미군이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미국과 연합국은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중순 중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까지 쳐들어온다.

 

그러자 중국은 10월 하순 펑더화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와 가정과 나라를 지킨다’(抗美援朝 保家衛國)라는 구호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진격했다. 

 

중국의 항미원조지원군은 항일전에 사용했던 ‘유격전’과 ‘지구전’을 전개해 제2차 전역에서 대승을 거둔다. 미군은 군사 장비 보급에서 모두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전했고 쌍방의 전선은 다시 38선으로 옮겨졌다. 미국은 ‘국민당군에 의한 화남 진공작전을 제창’(맥아더)하고, ‘원폭 사용을 고려’(트루먼 대통령)할 정도로 전면전을 벌일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1951년 2월 중순의 중국의 4차 전역 이후 전선은 일진일퇴의 교착상태에 빠지고, 이와 동시에 외교적 절충에 의한 정전회담이 진행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확대를 반대하고, 트루먼도 전쟁파인 맥아더를 파면하고 후임으로 리지웨이를 임명한다. 

 

이후 1951년 7월 10일부터 제1차 정전회담에 들어가나 소규모 전투는 계속된다. 정전회담은 2년 1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군사정전협정)을 조인한다.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전쟁회고록 『중국이 본 한국전쟁』(한국학술정보(주), 2008)의 저자 서문에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40년이 지났다. 이 전쟁은 아군이 현대적인 무기장비를 갖춘 상대와 죽음을 무릅쓰고 벌인 결전이었다. 아군 역사상 빛나는 한 페이지이기도 했다. 조선반도와 아시아를 둘러싼 평화를 가져오고 세계에서 우리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는 점에서도 아주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패배와 중미정상회담 그리고 대만 단교(斷交)

 

미국과 소련의 두 초강대국으로 나뉘는 냉전 속에서 중국은 1964년 1월 27일 프랑스와 국교 수립, 10월 16일 핵실험 성공으로 새롭게 국제무대에 등장한다.

 

미국은 1964년 8월 소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프랑스를 대신하여 베트남전쟁에 직접 개입한다. 그러나 막대한 전비와 전쟁 명분을 위해 외국군대가 필요했다. 일본에는 평화헌법으로 군대를 파견할 수 없지만 돈을 요구했고, 한국 등에는 군대 파병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 존슨 정부는 베트남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반전 여론 등으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1968년 말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은 베트남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다. 그리고 닉슨은 제37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 후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대아시아 관련 외교정책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끝내기는커녕 ‘종전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공격해 전선을 확대한다.

 

이런 정세 속에 작년 6월 16일 타계한 대니얼 엘즈버그는 미군이 베트남전 개입 명분을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는 내용의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한다. 「펜타곤 페이퍼」는 7,000쪽 분량의 문서로 베트남전 관련 정책 결정, 수행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사실을 은폐하고 의회와 국민을 오도해 전쟁에 개입하고 확대해 온 과정을 담았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조작된 전쟁의 문서를 공개하고, 베트남전 본격 개입을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보도한다. 이런 언론의 대대적인 폭로 보도는 반전 여론에 불을 지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37만 명이나 되는 징집대상자가 소집장을 불태우거나, 차라리 교도소행을 자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미국에서 반전운동은 더 불붙어 시위와 총파업이 연일 이어진다.

 

과거 닉슨은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과 함께 시궁창에 빠져있는 베트남전에서 벗어날 ‘명예로운 철수’를 구상했다. 또한 중국과 소련을 균열 내어 냉전의 틀을 재편성하려고도 했다. 

 

중국 또한 1970년 10월에 캐나다, 11월에는 이탈리아와 국교를 수립하고 서방 측과 관계 정상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런 정세에서 중국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는 중국 국제노선의 대전환을 준비한다. 이후 저우언라이와 키신저는 미중 데탕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1971년 4월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미국팀을 베이징에 초대한다. 이른바 ‘핑퐁 외교’를 성사시킨 것인데, 1972년 2월 닉슨은 중국을 방문해 미중정상회담을 한다. 

 

미국과 중국은 상하이 공동선언문에서 “첫째, 체제 간의 서로 다른 점을 서로 인정하고, 이를 넘어서 ‘평화공존 5원칙’에 기초하여 국제 문제와 양국 간의 문제를 처리한다. 둘째, 중국과 미국은 아시아에서 패권을 추구하지 않고, 패권주의에 반대한다. 셋째 ‘중국은 하나이고, 타이완은 중국의 일부다’라는 중국의 주장을 미국이 인정한다.”라고 선언한다.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화인민공화국만이 전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 합법정부이며, 대만·홍콩·마카오 등은 중국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유엔총회는 1971년 10월 26일 중국의 유엔 가입을 승인했다.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된다. 그리고 대만은 유엔과 관련 기관에서 배제된다. 

 

미국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79년 1월 1일 중국과 정식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했다. 

 

 

미국의 화평연변(和平演邊) 시도와 톈안먼(천안문) 사태 그리고 서방의 대중 제재

 

1989년 4월 15일 자유주의적인 지도자 후야오방 전 총서기가 타계한다. 이후 그를 추도하는 것을 넘어 업적을 찬양하고, 급기야는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학생시위로 변질한다.

 

이에 대해 4월 25일 덩샤오핑은 학생시위를 ‘게획적인 음모이고 동란이다. 그 실질은 당의 지도와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톈안먼 사태가 확산하자, 덩샤오핑은 “서방 국가들은 지금 한창 초연(硝煙) 없는 3차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다. 초연 없는 전쟁은 곧 사회주의 국가를 화평연변(사회주의 국가의 체제를 변화, 전복을 유도하는 전략) 하려는 전쟁 (중략) 당과 사회주의를 전복시키고, 완전히 서방측에 예속된 부르주아 공화국을 실현시키려 했던 것으로, 이르든 늦든 다가올 것이었다”라고 단호히 말하였다. 

 

또한 “중국이 폭난(爆亂, 톈안먼 사태를 말함)을 평정한 뒤 7개국 수뇌가 중국에 대한 제재 선언을 발표했는데 그들이 무슨 자격이 있으며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력을 주었는가? 진정으로 말하면 국권은 인권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약소국가와 3세계 국가들의 국권은 언제나 그들에 의해 침범당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정부의 공식문서인 인권 보고가 중국의 인권을 거론하면서 노골적으로 중국을 비난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내정간섭이며 미국의 궁극적인 목적은 중국에 대한 화평연변 전략을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라고 미국을 공격한다. 

 

당시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 대부분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영향을 받아 헝가리·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동독 등은 도미노 현상처럼 무너지기 시작한다. 특히 1989년 11월 동서냉전의 상징적인 존재인 베를린 장벽마저 무너진다.

 

세계는 중국 송(宋)의 유명한 문인 소동파(蘇東坡) 이름을 빗대어 ‘소동파(소련, 동유럽)는 중국에 도달하는가’라며 중국의 변화를 주시한다.

 

중국은 동구권과 소련이 몰락하는 사회주의 대사변의 시련 속에, 국가 생존 문제에 온 힘을 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국을 비롯한 서방 7개국은 1989년 7월 파리에서 개최된 G7회담에서 중국이 톈안먼 사태에서 폭력으로 인권을 짓밟았다고 비난하며 세계은행의 대중 차관을 중지하고 중국의 GATT 복귀를 연기하는 등 본격적인 대중 제재를 가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중국 지도부는 톈안먼 사태를 당의 지도와 사회주의를 근본부터 부정하는 동란으로 규정하며, G7 참가국의 내정간섭을 단호히 거부한다고 말하였다. 

 

물론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사람이 희생된 것은 잘못된 조치이지만, 당시 톈안먼 사태에 대해 중국 정부가 단호한 조처를 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중국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중미 패권전쟁과 미중 대리 선거 대만 총통선거

 

현재, 1월 13일 치러지는 대만 총통선거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하고 대륙과 관계를 중시하는 국민당의 허우유이 후보가 이기면 양안 관계는 안정되고 미·중 갈등에 대만이 변수가 될 가능성은 작아진다. 특히 중국을 포위·봉쇄하려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차질이 오게 된다.

 

중국 시진핑 주석은 지난달 말 발표한 ‘2024년 신년사’에서 “조국 통일은 역사의 필연”이라고 말했다. 또한 지난달 26일 열린 마오쩌둥 탄생 130주년 기념 좌담회에서도 “조국의 완전한 통일은 인민들이 바라는 바이며, 반드시 통일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뿐 아니라 2022년 신년사에서는 “조국의 완전한 통일은 양안 동포의 공통된 염원”, 2023년 신년사에서는 “양안의 동포들이 서로 협력해 중화 민족의 장기적인 복지를 이뤄야 한다”라고 계속해서 통일에 대해서 말했다.

 

반면에 분리 독립주의 친미·반중 후보인 현 여당 민주진보당(민진당)의 라이칭더 후보가 승리하면, 양안 긴장은 계속되면서 대만을 둘러싼 중미 갈등도 지금보다 더 첨예하게 이어질 것이다. 

 

현재 8년 동안 집권한 민진당은 1986년 창당하고, 양안 관계에서 대만 민족주의와 대만 자체의 독립을 지향하고, 양안 통일에 반대하는 공통의 목적이 있는 범록연맹(泛綠聯盟, 대만의 '비공식' 정당 연맹)의 핵심 정당이다. 

 

다만 당장 독립을 선포해 중국과 싸우겠다는 건 아니고 일단은 현상 유지가 현재 당의 노선이다. 하지만 차이잉원 이후 당권을 잡은 라이칭더와 샤오메이친 등은 다시 대만 독립(臺灣獨立, 약자는 대독, 화독은 중화민국 독립(中華民國獨立)의 약자)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작년 12월 22일 지난해보다 3% 많은 총 8,863억 달러(약 1,169조 원)에 이르는 내년도 국방예산안을 담은 국방수권법에 서명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대만과 관련해 “미국과 대만의 협력을 강화하고, 대만의 방위 능력을 향상시키며 평화적인 양안 관계를 촉진한다”라고 밝혔다. 

 

미국은 2024년부터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을 직접 견제하기 위한 지상발사형 중거리미사일 배치를 추진할 계획이다. 

 

대중 관계에서 미국은 ‘봉쇄’가 목적이지만,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가 굳어지면 한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 문제에 관한 중국의 협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윤석열과 정부·여당의 미국 바이든 추종 무책임한 반중 정책

 

과거 미국이 베트남전쟁 패배를 만회하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던 중국과 수교하면서 중국이 견지한 ‘하나의 중국’이란 원칙에 동의함으로써 대만과 외교 관계를 단절한 것을 민중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던 대만은 이후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던 역사 또한 민중은 알고 있다.

 

미국에 있어 한국은 바로 대만이다.

 

이용 가치가 없으면 대만처럼 미국으로부터 결국 팽 당한다.

 

뻔히 알면서 윤석열과 정부·여당은, 하나도 그런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미국에 멀쩡한 땅 주고 몸 대주고 돈 가져다 바치는 바보짓을 하고 산다.

 

미국의 시녀, 하수인, 주구. 이런 굴종, 예속인 나라는 없다.

 

민족자주야말로 민족의 생명이다.

 

노동자·농민 그리고 민중을 적으로 여기고, 나라를 망하게 한 것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모든 전쟁의 축은 미국이다. 

 

두 번 다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대만 총통선거로 중·미관계가 요동이 치면 남북관계는 자연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명약관화하다. 

 

자주통일운동 역량을 강화하여야 한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반제·자주·평화애호 세력은 총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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