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사람을 찾아서] 지춘란, 빨치산에 배속되다

- 작게+ 크게sns공유 더보기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기사입력 2024-01-11

지춘란은 6.25전쟁에 참전하여 빨치산에 배속(配屬)된다.

 

부군 황금수는 “여자는 보통 호(號)를 사용하지 않지만, 동지이자 아내인 지춘란에게 월산(越山)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젊은 나이에 산을 넘나들면서 살았다는 것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리고 부부로 살면서 이름 부르는 것보다는, 운동하면서 가명을 사용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호를 부르는 것이 편했다. 지춘란도 좋아했다”라고 겸연쩍어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지춘란의 판결문에는 “4284.2.15경 강원도 횡성에서 대남 유격대인 제3지대 간호장으로 편입되어”라고 되어있다.

 

이때는 중국의 항미원조지원군이 제4차 전역 1단계(1951년 1월 27일~2월 16일)를 진행할 무렵이다.

 

전역(戰役)은 전쟁과 전투의 중간 개념으로 여러 개의 전투, 즉 공세와 수세를 통틀어 일컫는 중국 군사용어이다. 예를 들어 국방군은 ‘중국 제1차 공세’라고 표현하나 중국인민지원군은 ‘제1차 전역’이라 한다. 

 

 

6.25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신속 대응과 이승만의 처신

 

6.25전쟁이 발발하자 26일 오전 3시(미국 시각, 한국 시각으로는 25일 오후 2시)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 소집되었다. 그러나 상임이사국 5개국 중 소련은 대만의 중국대표권에 대한 거부 표시로 유엔 참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렇게 소련이 참석하지 않은 호조건(好條件) 하에서, 미국은 동맹국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을 침략자로 규정짓고 ‘38선의 원상회복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틀 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미 공군과 해군에 대해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그는 맥아더 사령관을 즉시 출동 명령하고, 미 해군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급파했다. 3일 후 미 육군 제8군이 직접 지상 작전에 참전했다.

 

박세길의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돌베개, 1998)에는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미 극동사령관인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와 함께 공군의 98% 이상, 해군의 83.3%, 지상군의 88%가 미국군으로 구성된 이른바 국제연합군이 창설되었다”라고 쓰면서 유엔군은 거의 미군으로 구성되었다고 강조한다.

 

6.25전쟁 발발 후 미국의 대응은 신속하고 일사불란했다. 마치 준비된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이미 남쪽은 전쟁 전 전쟁으로 미군정에 의해 좌익세력과 모든 운동단체는 불법화되었기 때문에 지하로 숨거나 산사람(구 빨치산)이 되었다. 그야말로 친미 사대 매국 세력과 우익들의 천국이었다.

 

7월 12일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지휘권을 귀하에게 양도한다”라고 통고한다. 동시에 한국군 총참모장 정일권에게는 “귀관은 이후 유엔군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라고 명령했다. 이 통고와 명령은 조약이나 협정으로 성문화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회의 비준도 받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 국군을 지도하는 미군.


당시 한국의 임시 수도 대전에서 주한미군의 지위 및 재판 관할권에 관하여 체결된 한국과 미국 간의 협정은 소위 “대전협정”이라고 불린다. 

 

또한, 이승만은 7월 22일 총궐기대회에 “원래 우리 통일 문제는 언제든지 이러한 방식으로 해결될 것이 미리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바이다. 우리는 이러한 참화를 면하기 위해 무기와 군수물자를 확보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급기야 이와 같은 참화를 당한 뒤에야 비로소 전 세계의 50여 개국이 우리와 같이 힘을 합쳐서 싸움을 하고 있다. 이렇게 된 마당에 통일은 이미 결정이 된 것이다”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6.25전쟁 발발 이후 중국의 반응

 

전쟁 발발 이후 중국의 반응은 냉정하게 사태를 주시하고 분석했다.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전쟁회고록 『중국이 본 한국전쟁』(한국학술정보(주), 2008)에서 저자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조선전쟁이 일어났다”라고 표현했다. 

 

‘남침’ 또는 ‘북침’이라는 설명이 없다. 80년대 이후 중국의 공식 입장은 6.25전쟁을 내전으로 보고 있다.

 

6월 28일, 중국 마오쩌둥 주석은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8차 회의에서 연설하면서 북한과 대만에 대한 미국의 ‘침략’을 단호하게 경고했다.

 

홍학지는 회고록에서 “모 주석은 ‘나라마다 사정이 있는 법. 미국이 내정간섭을 해서는 안된다’, ‘중국인민은 침략을 당한 나라를 동정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같은 날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겸 외교부장은 성명을 발표했다. ‘트루먼의 27일 성명과 미 해군의 행동은 중국영토에 대한 무력침략이며 유엔헌장을 파괴하는 것이다. … 미국정부가 남한 이승만(李承晩) 군대를 부추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격하도록 한 것은 바로 예정된 구실이다. 미 제국주의가 아시아에 개입하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중국의 대표적 한반도 문제 전문가 김경일은 저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논형, 2005)에서 “맥아더가 지휘한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지향한 목표는 중국이었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대만 해방계획을 연기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중국공산당이 대만을 공격하기만을 고대하였다. 그의 후임인 리지웨이는 맥아더가 ‘특히 대만에 관해 관심이 많았다’고 회고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또한 김경일은 같은 저서에서 「將軍必败(장군필패)」를 인용하면서, 미국의 의도는 장제스를 이용하여 3차 세계대전을 획책하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일찍이 국공내전 시기에 중국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미국에서 명실상부한 군벌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들은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실제로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으며, 맥아더나 웨드마이어(장제스의 참모총장으로 일하며 중국 내 미군을 지휘한 인물 - 편집자 주) 등이 이 반동적인 군벌의 예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미국의 정치는 거대한 독점자본과 군벌이 결합되면서 제국주의적 색채가 갈수록 짙어지고 있고, 미국에서 파쇼 세력이 성장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아울러 자본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자들인 이 독점자본과 군벌들이 3차 세계대전을 획책하고 있으며, 이들은 이미 일본과 대만을 방대한 군사기지화할 방침을 확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은 부패하기 짝이 없는 장제스 독재정권을 부추길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중공중앙당안관편, 「장군필패」, 『중공중앙문건선집』(제16책), 중공중앙당교출판사, 1992.)

 

 

중국의 미군과 중국인민해방군 비교 분석

 

전쟁 초기 조선인민군(북한군)은 승승장구하며 한국군을 붕괴시켰다. 

 

그러자 트루먼은 이승만에게 자금 원조를 증가하고, 맥아더에 대한 군사 지원을 추가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그는 육군의 참전과 해·공군의 침략 범위를 38선 이북으로 확대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해·공군을 파견하면서 전선 붕괴를 만회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인민군의 전선이 길어 보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유엔군이 인천과 서울로 쳐들어와 뒷길을 끊어 놓을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제의에 따라 저우언라이가 주재하는 두 차례의 중앙군사위원회를 소집하여 국가 보위와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 구성 문제를 토론하였다. 그리고 7월 13일에 중앙군사위원회는 ‘동북 변방을 보위하는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인민군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낙동강까지 내려가지만, 유엔군의 저항으로 전선은 교착상태를 이룬다. 이때 중국공산당 중앙은 전쟁이 지구전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8월 하순 미공군은 중국의 동북 영공을 자주 침범하면서, 안동, 집안 등 도시와 농촌에 기관총을 퍼붓기도 했다. 이때 중국은 미국이 전쟁 규모를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미군에 대한 작전을 분석한다.

 

그러나 중국인민해방군은 미군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홍학지는 회고록에서 “미군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 각 부대는 미군에 대한 지식이 있는 국민당군 출신의 장병을 찾았다. 특히 미군과 함께 버마전선에서 작전을 벌였던 장병들로부터 미군의 장단점을 수집해 대책을 연구했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중국은 미군의 장점을 현대화된 장비, 뛰어난 기동성, 막강한 육군 지상화력 그리고 중국에는 없는 해·공군력 등으로 보았다.

 

그러나 중국은 미군이 갖지 못한 장점이 있었다.

 

홍학지는 중국의 장점을 회고록에서 “첫째, 아군은 침략에 반대해서 싸우는 것인 만큼 명분이 뚜렷했다. 국내 많은 인민들의 지지와 전 세계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중략… 둘째, 아군은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다. 수십 년 동안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벌여 열세한 장비를 가지고서도 장비가 우수한 적을 무찔렀다. …중략… 셋째, 아군은 기동성이 뛰어나 전선측면을 우회 공격해 적을 섬멸하는 데 자신이 있었다. 분산과 은폐도 뛰어났다. …중략… 넷째, 아군은 용감하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고생을 묵묵히 이겨낸다는 점이다. 반면 미군은 고생을 견뎌낼 수 있는 감투 정신이 모자란다. 마시는 물조차 일본에서 공수해 올 정도였다. …중략… 다섯째 우리는 조국을 바로 등 뒤에 두고 전투를 벌이기 때문에 군수품보급이 비교적 수월하다. 이에 반해 미군은 태평양을 건너와 작전을 벌이므로 필요한 군수품의 상당량을 미국 본토에서 수송해야 했다. 일부 작전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한다 해도 보급선이 우리보다 길어 인원 및 물자보급이 어려운 편이었다”라고 중국인민해방군을 평가했다. 

 

 

지춘란, 전상자를 후송하며 돌보다

 

이런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지춘란이 빨치산에 배속되기 전에 활동한 부군 황금수는 “지춘란 간호장은 조국해방전쟁(6.25전쟁) 때 전상자들을 미군의 공습을 피해 밤에 소달구지로 싣고 월경하여 임시 야전 병원에 놓아두고 내려오기를 반복했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유엔군이 인천 상륙 성공 후 인민군의 9.28 후퇴로 중국 국경까지 가는 1950년 겨울로 추론된다. 

 

격랑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노촌 이구영 선생의 팔십년 이야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심지연, 조합공동체 소나무, 2001)에서 “후퇴 중에 김일성 수상이 임춘추, 이강국, 최원택 이렇게 세 사람을 불러 이들에게 후송병원을 세워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라는 과업을 맡겼다. 김일성 수상의 지시에 따라 임춘추는 신의주 쪽에, 이강국은 두만강 쪽에, 최원택은 강계 쪽에 병원을 세우고 후송되는 인민군 환자들을 치료했다. …중략… 후일 이들 병원은 소속이 보건성 산하로 되면서 명칭도 전상자병원으로 바뀌었고”라고 증언한다.

 

이 증언대로라면 지춘란은 이 세 병원 중 한 곳에 배치되었을 경우가 크다.

 

추론 이유는 지춘란 판결문에서 “4283.4.7 평양에서 북한 괴뢰군에 편입되어 괴뢰군 중앙병원에서 소성(소위)으로 배치된 후 4284.2.15경 강원도 횡성에서 대남유격대인 제3지대 간호장으로 편입되어”라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군 황금수도 자주 ‘전상자’란 말을 지춘란에게 들었다고 한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URL 복사
x

PC버전

Copyright 자주시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