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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의 추학16] 형장에서 총맞고 살아남아 결국 변절한 예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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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2-03

 

▲ 반공 1인자로 자부한 예칭     © 자주시보, 중국시민

 

 

♦ 사형장에서 확인사살 당하고도 살아남은 사람 

 

입당시기로 “당내 경력”을 따지는 중국공산당에서 런줘쇈(任卓宣, 임탁선, 1896~ 1990)이라는 사람은 변절의 추학 13편(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7494의 쉬멍츄보다도 혁명경력이 더 오래다. 지금의 스촨성(四川省) 난충현(南充县, 지금은 난충시) 태생으로 기억력이 비상해 신동으로 불렸던 그는 20대에 프랑스에 가서 고학했으니 저우언라이(周恩来주은래), 덩샤오핑(邓小平등소평) 등의 유학시기와 겹치는데, 나이는 그들보다 이상이다. 여러 가지 사조를 비교, 검토한 뒤 공산주의를 받아들은 그는 1922년에 저우언라이 등과 함께 중국소년공산당을 조직했고 얼마 후 프랑스공산당에도 가입했다. 1923년에는 재유럽(중국식으로넌 뤼어우旅欧, 려구)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집행위원으로 되었다가 공산당원으로 전환해 후에 재프랑스 중공 책임자까지 됐었다. 중공의 초기 간행물인 《츠광(赤光, 적광, 븕은 빛)》등에는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하는 글들이 많았다. 

 

1925년에 국내노동운동을 지지하는 시위를 조직했다가 체포된 런줘쇈은 4개월 감금 뒤 추방당했으니, 당조직의 배치로 독일을 거쳐 소련으로 가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공부했다. 프랑스, 소련 유학경력에다가 외국어를 잘하고 이론수준도 높아서 대학에서 높은 권위를 누렸다 한다. 

1926년 말에 귀국한 그는 곧 당내에서 중용되어 여러 가지 직무를 맡았고 유명한 황푸군관학교(黄埔军校황포군관학교)에서 정치교관(政治教官)으로도 일했다. 

 

국민당의 배반으로 혁명이 저조기에 들어선 뒤인 1927년 말에 중공 후난성(湖南省, 호남성) 위원회 서기 왕이페이(王一飞왕일비)가 체포되니 런줘쇈이 후난에 가서 서기 겸 선전부장으로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변절자의 고발로 체포되어 사형에 언도되었다. 

겨울의 어느 날 오후, 10명이 감옥에서 끌려나가 죽 늘어섰다. 명령과 더불어 총소리가 요란스레 울렸고 사람들이 땅에 쓰러졌다. 일곱 번째 자리에 있던 뤈줘쇈은 등에서 뭔가 탁 치는 느낌과 함께 엎어져서 움직이지 못했는데, 누군가 “이 사람이 죽지 않았으니 확인사살하자(这个人没有死,补他一枪)”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총소리가 또 울렸고 사람들이 떠나갔다. 그런데 런줘쇈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총알이 눈알 하나를 꿰뚫었을 뿐 목숨을 빼앗지 못한 것. 

 

밤에 큰 눈이 내려 추워서 정신을 차린 런줘쇈은 “아직 죽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죽지 않았다고, 한 방 갈겨달라고 부탁했더니 상대방은 나는 관청 쪽 사람이 아니라 귀신가죽 벗기는(剥鬼皮)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즉 시체에서 옷을 벗겨다가 팔아먹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구해주겠다면서 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기에 런줘쇈은 바삐 우리 집은 스촨에 있는데 창사(长沙, 후난성 정부 소재지)에는 사촌여동생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런줘쇈을 부축하여 사형장을 떠나 부근의 농민 집에 안치했고, 뒤이어 통지를 받은 여동생이 오빠를 한 교회병원으로 실어다가 치료했다. 

 

사형장에서 총알 두 발을 맞고도 살아남은 전설을 낳은 런줘쇈은 재빨리 조직과 연계를 맺었고 중앙의 노선에 좇아 창사 등 여러 고장의 폭동들을 조직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체포되었다. 

 

 

♦ “반공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변신 

 

두 번째로 체포된 예칭은 쉽사리 공산당과 결별했으니, 창사시 법원 부원장 줘궈융(左国雍좌국옹)에게 “공산당에서의 나의 정치생명은 이미 죽었다! 이후에 나는 나의 신생을 추구하겠다(我在共产党的政治生命已经死去了!今后我要追寻我的新生。)”고 말했다. 

사형장에서 죽었더라면 공산당의 “런줘쇈 열사”로서 추앙받았을 텐데, 목숨을 부지해 살다가 변절하다나니 뒷날 이 사람은 “예칭(叶青)”이라는 국민당 선전가로서 널리 알려졌다. 

 

중국 트로츠키파의 대표적 인물인 쩡차오린(郑超麟정초린)은 평생 신앙을 꺾지 않았다는 게 자랑거리로서, 런줘쇈을 가리켜 중국 고전소설들에서 흔히 나오는 인물유형이라고 평가했다. 가난한 집안의 똑똑한 선비가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급제해 벼슬을 탔으나 탐관으로 되고 만 부류에 속한다고. 그는 현대에도 그런 인물들이 많아 혁명을 출세의 지름길로 간주했는데 믿을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쩡차오린의 정치견해 정확성여부를 젖혀놓고, 그의 인물평은 참조할 가치가 많다. 쩡이 지적한 부류의 인물을 조선(북한)에서는 “행세식 혁명가”라고 부른다고 기억된다. 

 

그러면 런줘쇈- 예칭은 신생- 새로운 삶을 찾아 무슨 일들을 했는가? 

제일 먼저 그는 줘궈융의 소개로 후난성에 주둔한 스촨성 군벌부대 제20사의 소좌 정치교관으로 되어 반공간부들을 전문 양성했다. 한동안 지나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정치생활에서 물러나서 옛날의 도연명(陶渊明)처럼 은거하여 농부로 살겠다고 선언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촨성 정부 소재지 청두(成都)로 가서 명인들에게 붙어살았고, 《과학사상》이란 잡지도 출판했다. 

 

1930년에는 친구의 초청으로 상하이에 가서 1929년에 세워진 신컨서점(辛垦书店, 신간서점)의 편집, 총편집으로 일하면서 글도 쓰고 번역도 했는데, 뒷날의 명작가 싸팅(沙汀사정, 1904~ 1992)의 전기에 의하면 서점 사람들은 “칭펑(青锋청봉)”이란 별명을 쓰던 예칭의 변절자 신분을 알고 모두 반대했으나, 스촨성 출신으로서 프랑스 유학경력을 가졌으며 서점의 주요인물인 양버카이(杨伯恺양백개, 1892~ 1949)가 그 사람의 상하이행은 중공 스촨성 위원회가 허락한 것이라고 설명하여 다른 사람들이 마지못해 찬성했다 한다. 그러고보면 당시 중공의 변절자 정책은 특별한 면이 많았다. 동지들을 밀고하여 죽게 만든 변절자들은 단호히 처단하는 동시에 예칭 같은 인물은 재능을 어느 정도 발휘하도록 한 것이다. 예칭은 러시아 혁명가 프레하노브의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등 저서들을 번역했고 진보서적들과 잡지들도 발행하여 사회적으로 일정한 명성을 쌓았다. 

 

서점 시기 예칭은 좌익들에 의해 트로츠키파로 지목되어 압력에 견디다 못해 물러난 예칭은 남과 합작하여 쩐리(真理진리)출판사를 만들었고 새 잡지 《시대사조(时代思潮)》도 발행하면서 활발한 문자활동을 벌렸다. 지금도 “예칭” 하면 “퉈파이(托派, 트로츠키파의 줄임말)”부터 떠올리게 되는데 그 자신은 트로츠키파가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그의 정체성은 아주 애매하다. 중공을 반대하면서도 단순한 반공주의자들과는 다른 색채를 띄었기 때문이다. 

 

“반공하는 마르크스주의자(反共的马克思主义者)”로서 자칭하던 예칭은 1939년에 정식으로 국민당에 가입하여 국민당의 배에 올라탔고 아예 “삼민주의이론가(三民主义理论家)”로 탈바꿈했으니 삼민주의란 국민당의 창시자 쑨중산(孙中山손중산)의 이론이다. 예칭은 쟝시성(江西省강서성)에서 “삼민주의문화운동”에 열성을 보였고 국립중정대학에서 “삼민주의연구회”를 창립, 지도해 주변의 몇 개 성에 영향을 끼쳐 쟝제스(장개석)의 표창을 받았다. 한결 성수가 난 예칭은 “중국삼민주의학회”를 발기했고, 차차 국민당 중앙당부 전문위원, 주앙조직부 연구실 주임, 전시청년훈도단 연구실 주임, 중앙간부학교 교수, 국민당 중앙 후보 집행위원 등 직을 역임했다. 

 

항일전쟁기간에 삼민주의이론가로서 국민당을 위해 선전하던 예칭은 1941년에 마오쩌둥의 저서들을 읽은 다음 독후감을 써서 “마오쩌둥주의”의라는 개념을 내놓았는데, 그 뜻인즉 “중국의 농민주의”였다. 농민과 농민주의는 소련의 공산주의이론체계에서 낙후함의 상징이다. 하기에 예칭의 “마오쩌둥주의”는 몇 해 후 중공이 공식적으로 당의 지도사상으로 지정한 “마르크스 레닌주의 기본원리와 중국의 실정을 결합”한 “마오쩌둥사상”과 전혀 다르고 뒷날 국제적으로 알려진 “마오이즘”과도 질적으로 차이난다. 

 

 

♦ 최장 반공기록을 자랑한 치욕의 변절자 

 

국민당이 참패가 분명해진 1949년에 예칭은 벼슬의 최고봉에 이르러 국민당 중앙 선전부 부부장으로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에 하이난도(海南岛해남도)에서 쟝제스가 물러간 타이완(台湾대만)으로 갔다. 반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공격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난 그는 국민당중앙 평의위원, 타이베이(台北대북)정치대학 교수, 정치작전학교 교수 등으로 일하다가 1990년에서 94세 고령으로 병사했다. 

 

1965년 그가 중국 풍속에 따라 70돌 생일을 1년 앞당겨 쇨 때 전 후베이성 주석 완야오황(万耀煌만요황)이 “밍이예칭샌 원인판꿍둬(名以叶青显,文因反共多)”라는 대귀를 축사로 써주었는데 그의 일생이 함축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름은 예칭으로 날리고 글은 반공 때문에 많노라”는 뜻이다. 

“반공원로(反共元老)”, “반공전문가(反共专家)”, “반공대부(反共教父)”인 예칭은 만년에 《나는 왜 반공하는가(我为什么反共)?》는 글에서 자신의 변절과 반공경력을 미화했다. 

그는 대륙시기에 창립한 파미르서점(帕米尔书店)을 만년에도 알심 들여 경영하면서 반공서적들과 반공잡지들을 출판했는데, 스스로 반공경력이 45년가량이라면서 상하이, 우한(武汉무한), 충칭(重庆중경), 난징상하이광저우(南京上海广州), 타이베이(台北) 다섯 시기에 붓과 먹, 입술과 혀로 반공했으니 중국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반공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고 자랑했다. 

평생 쓴 반공문장의 자수가 천만을 넘기는 “20세기 반공 제일인자”인 예칭은 “중공 역사에서 제일 매정한 변절자(中共历史上最决绝的叛徒)”라는 평가를 받는다. 허나 그가 열심히 쓰고 펴낸 그 많은 글과 책들을 뒷날 누가 보겠는가? 쓰레기 제조자라는 평어가 가장 어울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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