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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이야기86]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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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02-21

 

지난 회차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우리나라에 전해져 내려오는 사서들을 동부여에 관한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사서들에 전해져 내려오는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한 기록들을 단재 선생은 어떤 시각으로 분석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어차피 그동안 인용했던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단실기, 신단민사 등은 있었던 사실들만 그 내용이 옳건 그르건 상관없이 기록하여 전해왔을 뿐이지만 기록된 내용만을 인용하였다. 하지만 단재 선생은 사서들의 기록에 대해 옳고 그름에 대해 비교·분석하였다. 우리는 단재 선생처럼 사료들을 비교하고 분석할 기록들도 역사적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사서들의 내용과 함께 비교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럼 아래에서 북부여와 동부여에 관한 기록들을 분석한 단재 선생의 자료를 인용해 보기로 한다. 먼저 북부여에 관한 기록부터 보기로 한다.

 

<북부여의 문화>

 

북부여의 역사는 오직 해모수가 도읍을 세우 사실 이외에는 겨우 북부여의 별명인 <황룡각>이 고구려 유류왕 본기에 한 번 보이고 나서는 다시 북부여에 대하여 우리 조선인이 붓으로 전한 말이 없다. 전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두 중국사에서 초록한 것들이다. 북부여의 서울은 <아스라>, 곧 부소량이니 대단군 왕검의 삼경, 즉 세 왕검성 중의 하나이다. 지금의 러시아령 우수리는 곧 <아스라>의 명칭이 전해진 것인데 , 그 본지는 지금의 하얼빈이다.

이곳은 수처린의 망망한 평원으로서 토지가 비옥하여 오국이 잘 되었고 종횡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송화강(옛 이름은 아리라)이 있어서 교통이 편리함을 제공해 준다. 인민들은 부지런하고 검소하고 강건하고 용맹하며 큰 구슬과 적옥을 채굴하고 채색 비단과 수놓은 비단을 직조하고 여우, 너구리, 검은 원숭이, 수달의 모피를 외국에 수출하였다.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고 창고를 만들어 물건들을 가득가득 저장함으로써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였다. 또한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 금간옥첩의 문자도 왕궁에 저장되어 있었으며 <신지>라 불리는 이두문의 역사류나 <풍월>이라하는 이두문의 시가집도 대개 이 나라에서 수집된 것이다. 해모수 이후에 예와 선비를 정복하여 일시 강국이 되었으나 그 뒤에 에와 선비가 배반하여 고구려로 들어감으로써 나라의 세력이 드디어 쇠약해져서 조선 열국의 패권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163~164>

 

이상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북부여에 대하여 기록한 내용이다. 이미 전 회차 연재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단재 선생은 북부여에 관한 사료들을 전혀 접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위 내용에서도 증명이 되고 있다. 다만 단재 선생은 북부여에 대해서는 우리 조선인의 붓으로 전할 말이 없다. 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중국사에서 초록한 것들이다.”라고 언급하였듯이 북부여사에 대해 우리 겨레가 남긴 사료가 아닌 화하족이 남긴 몇 문장을 가지고 북부여에 대한 분석을 하다보니 오류가 날 수 밖에 없다. 이 문제는 비단 단재 선생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는 아니다. 대부분의 사료들이 드러내 보이는 문제들이다. 그동안 필자가 연재하는 과정이 수도 없이 강조해 온 바이지만 우리 겨레의 역사가 이와 같이 종잡을 수 없었던 이유는 첫째 이민족, 특히 화하족과의 전란과 근세 조선 초 우리 역사서를 모조리 거두어들여 불태우고 왕실에서 관리하는 서고에 비장한 이유가 크다. 또 일제 강점기 무여 20여 년에 걸친 역사 왜곡과 사책을 수거하여 불태웠으며 30여 만권에 이르는 방대한 사서들을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 왕실 서고인 정창원에 수장을 하면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 것이다.

 

둘째는 비록 전란과 내부 문제가 있었을지라도 김부식이 사국사기를 저술한 때까지만 해도 고려에는 그 이전 시기, 즉 후기 박달나라, 북부여 및 삼한,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간행한 역사서들이 상당량이 있었다고 단재 선생이나 여타의 역사 학자들이 고증을 하였다. 그럼에도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 조상들이 남긴 사서들은 거의 참고하지 않고, 대부분을 화하족들이 남긴 사서들을 참고로 하였다. 또 비록 화하족들의 사서를 참고하였을지라도 그 자료들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역사들에 대한 기록들도 다수 기록되어 있었음에는 소위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는 아예 기록들조차 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의 참고 사서들이 화하족들의 것이다 보니, 삼국사기에 기록된 전사를 읽다보면 이게 과연 우리 조상이 남긴 자료인지, 화하족이 남긴 자료인지 전혀 분간이 안된다. 거의 모든 전사들이 화하족들이 주가 되어 있으며 그 서술 방법 또한 화하족들이 쓴 그들의 기록으로써 이건 도저히 우리 조상들이 남긴 우리의 역사서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기록이다. 결국 김부식이 반역사적 반역행위는 두고두고 우리 민족사에서 단죄를 받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단재 선생같은 민족성이 투철한 민족사가가 아무리 민족적 입장에서 사서를 고증하고 논증하여 정리하고자 해도 그 한계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필자가 역대 수많은 사가들이 정리하여 세상에 내놓은 사서들을 섭렵하고 또 그 사료들을 분석해 봤지만 단재 선생처럼 강력한 민족의 주제성을 기반으로 자주적 입장에서 역사를 복원하고 기틀을 세우기 위해 노력을 한 철저한 민족주의 사학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단재 선생이 사료의 부족으로 위와 같은 오류를 드러내는 사태는 우리 민족의 비극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단재 선생이 기술한 <북부여의 문화>에서 지적하 중요한 내용을 발견할 수가 있다. 북부여의 서울은 <아스라>, 곧 부소량이니 대단군의 삼경, 즉 세 왕검성 중의 하나이다.”라고 고증을 한 것은 대단히 정확하다. 북부여는 후박달나라의 삼조선 가운데 신조선의 땅에서 건국하였다. 즉 부부여의 시조인 해보무가 후박달나라 제47대 고열가 단군이 장당경 아사달에 들어가 신선이 되니 단군조선의 대가 끊기게 되자 서기 전 239년 재위에 오름으로써 북부여를 건국하였으며 서기 전 기사년 재위에 오른지 8년 만에 후박달나라의 도읍지에 입성하여 후박달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였다. 단재 선생이 비록 북부여에 관한 사료를 접하지 못했다 해도 북부여의 도읍지가 <아스라>, 곧 부소량이라고 고즈한 것은 정확하다.

 

이곳은 수천리의 망망한 평원으로서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었고 -중략-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고 창고를 만들어 물건들을 가득 저장함으로써라고 고증한 부분은 화하족들이 기록한 부여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특히 진수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인용하여 고증을 한 내용들이다.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하는 금간옥첩의 문자도 왕궁에 저장되어 있었으며 <신지>라 불리는 이두문의 역사류나 풍월이라 하는 시가집도 대개 이 나라에서 수집된 것이다.”라는 부분은 단재 선생이 우리 민족사, 즉 후박달나라의 존재를 확신하고 또 우리 민족 구성원들에게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와 그 사실들을 신뢰하기에 인용문에서처럼 고증을 하고 논증을 한 것이다.

 

북부여의 역사적 기록에 대한 단재 선생의 고증과 논증은 자료의 한계로 인하여 부족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 부족한 자료들을 가지고 북부여의 역사를 고증하고 논증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기에 단재 서생은 위 인용문과 같은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이제부터는 북부여와 동부여의 분립에 대하여 단재 선생이 고증하고 노증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한다. 물론 원저에는 <북부여의 문화>가 뒷부분이지만 실제 역사적 시대로 보면 북부여가 건국하고 약 153년 후 동부여가 건국을 하였다. 따라서 시대별 선후차에 따라 <북부여의 문화> 부분을 먼저 살펴본 것이다.

 

후자는 이 기록이 너무 신화적이어서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 어느 나라든지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어서 후세 사가들이 그 신화 속에서 사실을 채취할 뿐이니 이를테면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천신이 아란불에게 내려왔다.’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 말들은 다 신화이지만 해부루가 다른 사람의 사생아인 금와를 주워서 길러 태자를 삼은 것은 사실이고 해부루가 아란불의 신화에 의탁하여 천도를 단행한 것도 사실이며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고도를 습격하여 치지한 것도 사실이니, 총괄하면 동·북 부여가 분립한 역사상 빼지 못할 큰 사실이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158~159>

 

위 단재 선생이 고증한 북부여, 동부여의 건국과 분립 등이 혼재되어 있지만 그 분석 방법은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세계의 고대사를 고증하고 논증하는데에 각 민족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나 설화 등을 통해 당시의 역사적 사실이나 실체를 규명하고 있다. 그 실례가 바로 이탈리아 폼페이의 역사를 복원해 낸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 폼페이라는 고대 도시를 현대에 거의 완벽할 정도로 발굴해 낸 것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설화가 결정적이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겨레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신화나 설화 등도 허투루 대하지 말고 그 안에서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위 단재 선생의 인용문에서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다닌다거나 천신이 아란불에게 내려왔다고 하고,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등의 말은 분명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당시 실제 했던 역사적 사실을 미화하거나 치욕적이거나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을 순화시키거나 합리화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단어, 언사, 문장의 구성이다. 이를 실제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여 결코 내팽개쳐서는 절대로 안된다.

 

단재 선생이 고증한 것처럼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가 실제로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고는 여기지 않으며 실제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그건 다만 당시 역사적 사실을 미화하기 위해 동원한 합리화의 문장구성일 뿐이다. 실제 한단고기 단군세기 고열가 단군 58년 조에는 이 보다 앞 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단기고사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5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대를 일을 후사가 없으므로, 종친 해모수가 옛 도읍지 부여에서 반기를 들어 나라를 세우니 북부여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한단고기 단군세기 고열가 단군 58년 조나 단기고사 후단군조선 제23세 고열가 단군 58년 조의 기사의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북부여 시조인 해모수 단제는 후 박달나라의 임금가문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해모수는 후박달나라가 쇠약해지고 나라의 기틀이 무너져가고 있는 시기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세력들과 자신을 지지하는 힘있는 집단을 이용하여 군사적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다만 해모수 단군이 일으킨 군사반란은 당시의 백성들과 힘을 가지고 있는 지도세력들의 압독적 지지를 받아 성공을 거두고 후박달나라를 이어 북부여를 건국하게 된 것이다. 즉 성공한 군사쿠데타로서 <군사혁명>이었던 것이다.

 

성공한 군사반란을 통해 북부여를 건국하게 되니 시조인 해모수 단군에 대한 미화를 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미화작업의 일환으로 천왕랑이라 칭했다.” “신인(神人)이다.” “하늘에서 내려왔다.”거나 하였던 것이다. 후일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해 심층적으로 연구하여 상세하겠지만 어차피 언급을 하였으니 한단고기 북부여 상 해모수 다군 조를 간략히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임술 원년(B.C 239)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천왕랑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구열가 57년 임술 49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게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한단고기, 계연수 엮음, 임승국 번역·주해, 정신세계사 125>

 

그러나 비록 신화적 용어와 문장을 동원하기는 하였지만 단재 선생이 언급한 것처럼 북부여 시조 해모수가 쇠망해가는 후박달나라를 이어 북부여를 건국한 것도 역사적 사실이자 실체이다. 또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여 나라의 힘을 튼튼하게 다짐으로써 우리 겨레가 1만여 년 가까이 역사를 이어오고 삶을 꾸려왔던 것이다. 북부여가 건국하여 존재하게 됨으로써 뒤를 이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나라가 등장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명백을 튼튼하게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단재 선생이 고증한 북부여, 동부여 분립에 대한 명확한 시간적 순서에 대해서는 지난 회차에서 언급을 하였기에 더 이상 언급은 하지 않는다. 다만 인용문 가운데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고도를 습격하여 차지한 것은 사실이라는 해석에 대해서는 명백히 구분을 하도록 한다. 위 인용문은 북부여 시조 해모수와 제5세 단제인 고두막한이 재위 탈취과정이 혼재되어 있다. 이를 명백히 구분하기 위해 한단고기 북부여기의 관련 기록을 보도록 한다.

 

첫째, 해모수 단제 재위 기사 8(B.C 232) 단제께서는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바로 이 과정이 해모수 단군이 북부여를 건국하고 재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후박달나라의 도읍지 즉 구도에 입성하여 후박달나라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실체이다. 앞서 한단고기 단군세기 고열가 단군 58년 조를 인용하여 보았듯이 해모수 단군은 처음부터 후박달나라의 도읍지에 입성한 것이 아니고 고열가 단군이 도읍을 삼고 있던 이전의 도읍지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따라서 해모수 단군은 백악산 지역을 습격하여 획득하고 북부여를 건국한 8년 후인 기사년에 당시까지 후박달나라 도읍지에 무혈입성을 한 것이다.

 

위 인용문 중에 마침내 공화이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라 함은 후박달나라 제47세 고열가 재위 58년 계해 "3월 하늘에 제사하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고 - 중략- 이튿 날 아침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 일을 함께 다스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라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는 후박달나라 마지막 임금인 고열가 단제가 스스로 물러나 대가 끊기고 그 후 6년 동안은 오가들이 합의하여 나라를 이끌어왔음을 기록한 것이다. 결국 해모수 단제는 임술(B.C 239)년에 후박달나라의 고도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북부여를 건국한 7년 후 기사(B.C 232)년에 이르러서야 후박달나라의 도읍지에 무혈입성하여 드디어 후박달나라의 지경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둘째, 북부여 제5세 단군 고두막 역시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 단군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북부여 제5세 단군으로 즉위하게 된다. 이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한다.

 

고두막은 계유(B.C 108)년에 졸본에서 즉위를 하고 스스로 동명이라고 칭하였다. 고두막도 역시 북부여가 쇠해진 틈을 타 군사반란을 일으켜 성공하고 북부여 제5세 단군으로 재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대한 한단고기 북부여기 5세 단군 고두막조를 인용해 보기로 한다.

 

계유 원년(B.C 108), 이 해는 단군 고우두 13년이다. 제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구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B.C 106)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려국이 땅이었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하 계연수 엮음, 임승국 번역·주해, 정신세계사, 135>

 

계유(B.C 108)이면 한의 유철(무제)가 번조선의 우거를 무너뜨리고 번조선의 땅에 사군을 설치하고자 대대적으로 군사를 투입하였던 시기이다. 물론 우거의 멸망에 한나라의 침략이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지만 우거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할 것이다.

 

이와 같이 북부여의 관경 내의 번조선이 멸망하고 외적인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나라가 쇠하게 되자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연전연파하는 전공을 세우게 된다. 이에 도두막은 북부여의 왕실과 지도 계층을 그대로 두고서는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로 자칭 동명이라 하였던 것이다고두막이 졸본에서 제위에 오르고 세를 불려가는 사이 북부여 왕실은 갈수록 쇠약해져만 갔다. 이에 더 이상 나라를 이끌어갈 힘이 없었던 북부여 왕실은 제위 23년 계미(B.C 86)에 성읍을 들어 항복을 하였다. 북부여 왕실이 성읍을 들어 항복을 한 계미에 고두막은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한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고두막의 위협과 압박 그리고 나로 세를 불려가는 고두막 세력의 위세에 눌려 북부여 제4세 단군 고우루는 이를 심히 걱정하다가 붕어를 하고, 고우루의 동생 해부루가 재위에 올랐으나 역시 고두막의 압력에 못이겨 결국 계미년에 성읍을 들어 고두막에게 항복을 하게 된 것이다.

해부루가 성읍을 들어 고두막에게 항복하기 이전 국상 아란불이 통화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오곡은 썩 잘 됩니다. 도읍을 둘만한 곳입니다.”라고 해부루에게 아뢰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각 즉위한 해부루와 군신들은 고두막의 끊임없는 위협에 굴복을 하고 성읍을 들어 항복하고, 가섭원에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를 건국하게 된 것이다.

 

한단고기의 기록을 보면 해모수는 스스로 천왕랑이라 칭했지 천제의 아들이다.”고 하지 않았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제의 아들이다.”라고 스스로 칭한 것은 고두막이다.

 

마지막으로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에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돌을 뒤집어 보니, 누런 황금색 개구리 모앙의 아이가 있었다. 이를 보고 왕이 말했다. ‘이는 하늘이 주신 나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를 데려와서 기르면서 이름을 금와라 부르고 태자로 삼았다.”라는 신화적 문구에 대해서 단재 선생은 해부루가 다른 사람의 사생아인 금와를 주워서 길러 태자로 삼은 사실이다.”라고 분석한 것은 이를 신화로 치부하여 무시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로써 정확하게 분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 신화적 문구를 인용한 해부루와 금와의 미화작업의 진실은 단재 선생이 분석한 남의 아이이거나 혹은 당시에는 철저한 신분 사회였기에 왕족이 하층민의 여자와 관계를 하여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허용이 되지 않았기에 후사가 없는 해부루가 온갖 방법을 써도 자식을 얻을 수 없기에 하층민의 여자와 정을 통하여 얻은 자식일 가능성도 대단히 크다고 본다.

  

이렇게 우리는 신화와 같은 문장으로 꾸며진 탄생, 건국, 전쟁사들을 신화이니 역사적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거나 무시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신화와 같은 사적 기록들 속에서 진실과 역사적 실체를 알아내어 우리 조상들의 위대하고 찬란했던 역사를 살려내어 후세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2018121

서울구치소에서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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