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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의 추학 번외편] 극과 극을 달린 비공산당원 변절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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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3-04

 

 

 

“변절의 추학” 시리즈 18편은 모두 중국공산당의 변절자들을 다뤘다. 공산당원들은 공산주의라는 확실한 신앙을 가졌고 당기 앞에서 선서도 했던 사람들이므로 변절이 유달리 추하게 드러나고 중공의 조직 특성상 변절여부를 굉장히 중시하여 엄청난 인력, 물력을 들여 조사하며, 진술, 자료, 사건사고들에 근거하여 공식결론을 내리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건과 시대의 제한성 때문에 전날 내린 결론이 뒷날 뒤집혀지는 경우도 있는 바, 이에 대해서는 시리즈의 몇 편에서 인물들의 운명변화를 통해 소개했다. 중국 역사학계에는 자본주의 국가에 없는 당사(党史, 당의 역사)라는 특수한 전문분야가 존재하고 많은 학자들이 연구결과를 내놓으므로 글, 책, 인터넷 자료들로 누군가의 변절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당의 변절자들이 당의 공식서류들로 확인됐으므로 당의 “쩡쓰제룬(正式结论정식 결론)”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면 변절여부를 확정할 수 있다. 

 

조선(북한)에서 중국의 당사와 맞먹는 개념이 “당력사(당역사)”이고 당역사연구소는 굉장히 중요한 지위를 가지니, 조선노동당의 역사만 다루는 게 아니라 근현대사도 연구범위에 속한다. 언젠가 중국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홍범도 무덤과 비석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나왔을 때, 조선에서는 바로 당역사연구소 책임자가 중국에 파견되어 실물을 확인하고 조사도 해서 가짜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조선족 학자들이 내린 결론과 같았다. 그 홍범도 비석이 진짜냐 가짜냐가 왜 중요한가? 진짜라면 일제가 조작한 괴뢰 만주국 치하에 홍범도가 돌아가서 살다가 죽었으니까 절개를 지키지 못한 셈이 아닌가! 결국 무덤의 주인 홍 아무개가 홍범도는 아니고 비석은 무덤 주인의 후대들이 낭설에 근거해 제멋대로 세웠음이 밝혀졌다. 홍범도 만큼 큰 인물은 아니더라도 일제시기 누가 어떤 말, 어떤 일을 했느냐에 대해서는 당과 정부 차원에서 세밀한 조사를 진행했기에 일제 강점기에 친일했느냐, 전쟁시기에 나쁜 짓을 했느냐는 공식결론이 나온지 오래다 하며, 전대의 언행이 후대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출신성분”으로 표현된단다. 다수 탈북자들이 즐겨 쓰는 레퍼토리가 자기는 공부를 잘했는데, 일을 잘했는데 출신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했다, 당원이 되지 못했다, 간부로 승진하지 못했다 등이다. 헌데 그놈의 출신성분이 왜 생겨났는지 조상 이야기를 제대로 하는 탈북자는 거의 없으니 해괴한 현상이 아닌가? 

 

중국으로 돌아와 현대사에는 공산당 변절자 외에도 변절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 상당수는 워낙 이렇다 할 신앙이나 신념이 없었고 명백한 주장도 없이 그저 형세에 따라 밥먹는 자리를 옮기는 정도였기에 구태여 “변절”이라고 정의하기조차 어렵다. 허나 어떤 사람들은 한때 뚜렷한 주장을 펼치면서 눈에 뜨이는 행동들을 하다가 뒷날 확 변해버렸기에 “변절”이 분명하다. 비공산당원 변절자들 가운데서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사람 셋을 골라 “변절의 추학” 번외편에서 다룬다. 

 

 

청년혁명가로부터 최대 한간으로 변신한 왕징워이 

 

중국인들에게 20세기 중국역사에서 가장 큰 한간(汉奸, 중국을 배반한 자)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글을 모르는 어린이들을 내놓고는 왕징워이(汪精卫왕정위, 1883~ 1944)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본명은 왕자오밍(汪兆铭왕조명). 

 

▲ 중국 친일파 제1호 왕징워이     © 자주시보, 중국시민

 

그런데 이 사람이 청년시절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혁명가였다. 순중산(孙中山손중산, 1866~ 1925)이 영도한 청나라 반대 혁명운동은 크게 무장폭동과 테러암살로 나뉘는데, 돈이 많이 들고 희생자도 많으며 실패를 거듭한 무장폭동에 비해 암살은 원가가 낮고 성공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허나 참여자의 희생확률은 무장폭동에 비해 훨씬 높았으므로 그야말로 죽을 각오를 한 사람들 만이 테러암살에 가담했다. 게다가 청년 왕징워이와 동지들의 목표는 청나라의 최고실권자이며 황제 부의(溥仪푸이, 1906~ 1967)의 아버지인 섭정왕 재풍(载沣, 1883~ 1951)이었다. 

 

1902년 19살 때 과거시험에 참가하여 1등 수재로 합격했던 왕징워이는 이듬해 관비(官費, 국가가 비용부담) 유학생으로 되어 일본에 갔는데 1905년 7월에 순중산을 만나서 순이 지도하는 동맹회에 참가하여 우선 글솜씨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선전사업을 많이 하던 그는 1910년 1월 동지들과 함께 청나라 수도 베이징(北京북경)에 들어가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재풍 암살준비를 하던 차에 체포되었다. 종신감금형을 선고받은 왕징워이는 “칼에 맞아도 통쾌하거니, 젊은이 머리를 저버릴소냐(引刀成一快,不负少年头)”는 시구를 지었는데, 그 시구가 널리 퍼지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혁명가로 알려졌다. 헌데 뒷날 밝혀진데 의하면 그는 청나라 숙친왕 선기(善耆, 1866~1922)의 유화정책에 넘어가 강경한 반청태도를 바꾸었다 한다. 

 

1911년 10월 10일에 우창기의(武昌起义)로 신해혁명이 일어난 후 실권자 원세개(袁世凯)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왕징워이는 전날의 주장들과 거리가 있는 행동들을 했다. 

그래도 화려한 경력과 훌륭한 말솜씨 및 글재주 덕분에 인기가 꾸준히 올라갔으니 순중산의 조직내부에서 높은 자리들을 차지했고 전국에서는 “민국 4대 미남자”의 하나로 꼽혔다. 

1925년 3월에 순중산이 서거할 때 유언을 정리한 사람이 왕징워이였고 당내에서의 지위는 그때 자그마한 황푸(황포)군관학교의 교장에 불과했던 쟝제스(蒋介石장개석)가 비길 정도가 아니었다. 

헌데 쟝제스는 권모술수가 능했고 군대라는 자신의 기반이 단단했으므로 왕징워이와 다른 원로들을 하나하나 물리치면서 국민당 및 전국의 최고권력자로 부상했다. 국공합작, 분열, 북벌전쟁, 군벌혼전 등등 복잡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왕징워이는 때로는 국민당 1인자, 때로는 2인자로 되었는데, 정부 책임자인 행정원장(行政院长)도 했으나 자신이 장악한 군대가 없는 것이 최대의 약점이었다. 

공산당보다 더 강경한 구호들을 내걸다가 공산당을 치고 쟝제스를 욕하다가 그와 손잡는 등등 변덕스러운 언행을 많이 하던 왕징워이는 반일과 항일 자체를 반대했다. 그의 논리는 제도도 인간도 무기도 남보다 못하기에 중국이 일본과 싸우면 반드시 망한다는 것. 

 

1937년 7월 7일 루거우챠오사변(卢沟桥事变노구교사변)으로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발발한 다음에도 왕징워이는 전쟁으로 중국이 완전히 망한다면서 일본과의 적당한 타협을 주장했다. 밑지더라도 망하기보다는 낫다고 떠들던 왕징워이는 1938년 12월에 친일파들을 이끌고 임시수도 충칭(重庆중경)을 떠나 베트남의 하노이로 가 친일주장들을 펼쳤는데, 쟝제스가 파견한 특무들이 이듬해 3월에 왕징워이를 암살하려다가 비서를 죽인 뒤, 왕징워이는 철저히 일본 쪽으로 넘어가서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의 원래 수도 난징(南京남경)에 괴뢰정부를 세웠다. 1940년 3월의 일이다. 난징정부와 충칭정부는 어느 편이 중국을 대표하느냐 다퉜고, 왕징워이 국민당과 쟝제스 국민당 또한 어느 편이 정통 국민당이냐를 다퉜다. 역사 혼란시기의 웃지 못할 현상이다. 

 

전날 중국 각지에 세워졌던 괴뢰정권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왕징워이 국민정부의 산하에 들어갔고 내력이 갖가지인 괴뢰군들도 만들어져 왕징워이는 평생 처음으로 정권과 군권을 다 가져보았다. 허나 모든 실권은 일본인들의 손에 쥐어졌으므로 왕징워이는 결국 꼭두각시노릇이나 했다. 좀 특이한 행동은 그가 공산당지역에 파견할 특무(스파이)들의 강습반에서 직접 특무활동에 대한 강의를 했다는 것. 물론 왕징워이의 훈련을 받은 자들이 다수 잡혔으니 그의 특무능력수준도 별 볼 일 없다. 

 

전날 암살자의 총에 맞은 옛 상처가 도져서 고생하던 왕징워이는 일본에 가서 치료를 받다가 1944년에 나고야에서 죽었다.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병사, 암살 등 설들이 존재한다. 

그의 주검은 난징으로 운반되어 굉장히 큰 장례를 치르면서 큰 무덤에 묻혔다가, 일본 패망 뒤 1946년 1월에 쟝제스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 무덤이 폭약에 파괴되고 시체는 불살라졌다. 중국에서는 1945년의 전쟁종결 이후 국민당 주도로 한간청산이 일정하게 진행되었고 1949년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공산당 주도로 여러 차례 정치운동을 거쳐 한간청산이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모두 한간으로 인정하고 처벌한 인간들은 법정결론이나 역사자료, 학술서적, 통속서적 등을 통해 거듭거듭 확인된 터이다. 단 근년에 한간들을 추켜세우는 움직임이 반국민당, 반공산당, 반중국을 목적으로 하고 인터넷을 무대로 삼아 제법 요란스러워지는데 대세를 뒤집기는 역부족이다. 

 

일본의 일부 사람들과 중국 출신의 친일파들은 왕징워이의 용모, 학식, 글씨부터 시작하여 인격도 부풀리고 처사도 현명했다는 식으로 찬미한다. 그러나 왕징워이라는 인간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청나라 말년에 암살실패로 죽었더라면 다른 열사들과 마찬가지로 후세사람들이 우러러보았을 왕징워이가 살아남아 갖은 약점들을 드러내면서 별별 웃기는 나쁜 짓들을 많이 했기에 결국에는 최악의 인간으로 평가받는다. 신해혁명의 원로반열에 끼이던 인물들 중에서도 왕징워이 만큼 악명을 남긴 사람은 드물다. 

 

 

반일학생운동 열성분자였다가 일본에 붙어 산 메이스핑 

 

신해혁명은 중국 땅에서 2천년 넘어 존재하던 황제를 없앴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지만 사회제도도 인간의식도 바꾸지 못했으므로 제한성이 많다고 인정된다. 황제만 없어졌을 뿐이라는 게 당시와 후세의 평가이다. 

 

중국 현대사에서 인간의식의 커다란 변화는 1919년의 5.4운동으로 시작되었다. 4년간 지속된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에 끝난 다음 중국은 민부들을 유럽전장에 파견하고 정부 차원에서 독일 등 나라들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덕분에 전승국명단에 끼었다. 헌데 프랑스 베르사이유에서 열린 회의에서 전승국 대접을 받기는 고사하고 전날 독일이 산둥성(山东省산동성)에서 차지했던 칭다오(青岛청도)일대와 누리던 특수권리를 일본이 물려받는다는 등 패전국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았다. 중국 정부가 매국적인 조건들을 받아들이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대규모 반대운동이 벌어졌고 5월 4일 베이징에서 일어난 시위가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원세개가 남긴 북양군벌(北洋军阀)이 만든 정부에서 매국적으로 지목된 사람은 폐제국(币制局) 총재 루중위(陆宗舆육종여, 1876~ 1941), 교통총장 차오루린(曹汝霖조여림, 1877~ 1966), 일본 주재 공사 장중샹(章宗祥장종상, 1879~ 1962) 셋이었다. 

베이징 13개 학교의 학생들을 위주로 하여 시민들이 참여한 시위대오는 톈안먼(天安门천안문)광장을 거쳐 대사관 밀집구역에 이르렀다가 군대와 경찰의 저지를 받으니 외교부와 차오루린의 집으로 가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전진방향을 바꾸었다. 차오루린의 집인 자오쟈러우(赵家楼조가루)에 이르러 닫힌 창문을 부수고 쳐들어간 학생들은 차오루린을 찾지 못하니 집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을 “자오쟈러우 불사르기(火烧赵家楼)”라고 부른다. 한편 일본인으로 위장한 장중샹이 학생들에게 발견되어 얻어맞았다. 불길이 솟구치니 군대와 경찰들이 달려와서 학생 32명을 체포했는데, 자오쟈러우에 쳐들어가고 불을 지핀 쾅후성(匡互生광호생, 1891~ 1933)이 자수하여 학우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동창생들에게 저지되었다. 

전국적으로 시위행진, 파업, 청원, 폭력대항 등 애국운동이 벌어진 결과 6월에 북양정부는 학생들을 석방하고 차오루린, 루중위, 장중샹을 해직시켰다. 

 

정부의 무능한 외교에 반발하여 시작된 “5· 4운동”은 제국주의,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애국운동으로 커지면서 그보다 좀 앞서서 시작된 신문화운동(新文化运动)도 5· 4운동 덕분에 세가 커졌고 전면적으로 중국의 역사와 제도, 민족의 특성을 반성하게 되었다. 2년 뒤 중국공산당의 탄생은 5· 4운동과 갈라놓을 수 없으니 청년학생지도자들 중에 적잖은 사람들이 중공의 초기 당원들로 된 건 공산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내서였다. 하기에 중국공산당이 쓰는 역사에서 5·4운동의 지위가 아주 높아 구민주주의혁명과 신민주주의혁명의 분수령으로 간주된다. 

 

5· 4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끼인 운동으로서 참여자, 지도자들의 뒷날 경력도 다양하다. 그런데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두 사람이 있어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매국적으로 지목되어 최대 공격목표로 되었던 차오루린과 5월 4일 현장에서 활약했다는 메이스핑(梅思平매사평, 1896~1946)이다. 

 

▲ 차오루린(왼쪽)과 메이스핑(오른쪽)     © 자주시보, 중국시민

 

일본에 유학했던 차오루린은 감정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친일파였는데 5·4시위로 큰 충격을 받았고 다음 달 해직된 다음에는 실업계로 넘어가서 은행 총경리, 탄광 사장, 회장 등 직을 맡았다. 1930년대 일본이 중국 북부를 강점한 뒤에 차오루린은 “만년의 절개로 전날 잃은 명예를 만회하겠다(晚节挽回前誉之失)”면서 괴뢰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 괴뢰정권들이 무슨 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차오루린은 실제 일을 하지 않았고 매국활동에도 끼이지 않았다. 하여 항일전쟁 승리 후에 처벌을 받지 않았고 타이완(대만)을 거쳐 미국에 가서 살다가 죽었다. 사후의 명예는 유지한 셈이다. 

 

베이징대학 학생이었던 메이스핑이 걸은 길은 차오루린과 정반대다. 어떤 사람들은 메이스핑이 자오쟈러우에 불을 질렀다고 주장하는데, 보다 많은 사람들은 쾅후성을 지목한다. 단 메이스핑이 1919년 5월 당시 격렬시위에서 활약한 건 공인된다. 졸업 후 대학 교수, 국민당중앙 법제전문위원회 위원 등 직을 맡았던 메이스핑은 항일전쟁이 터진 다음 항전을 반대하는 “저조구락부(低调俱乐部)”의 주요성원으로 되었고 왕징워이를 대표하여 일본과의 밀약담판에 참가했으며 욍징워이의 국민당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집행위원, 조직부 부장, 왕징워이 괴뢰정부에서 공상부 부장, 실업부 부장, 양식위원회 위원장, 내정부 부장, 저쟝성(浙江省절강성) 성장 등 직을 역임하면서 나쁜 짓들을 많이 했다. 하여 1945년 일제 패망 뒤 체포되었고 이듬해 9월 14일에 총살되었다. 

일본에 굴복하는 조약을 반대하여 시위에 나섰던 열혈청년이 나중에는 차오루린을 능가하는 매국적으로 되어 형장에서 이슬로 되었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항일을 위한 시안사변의 영웅 순밍쥬가 일본괴뢰정부에 들어간 사연 

 

1936년 12월 12일에 일어난 시안(西安서안)사변은 10년 내전을 종식시켜 이듬해의 전면 항전을 위해 토대를 닦았다고 평가된다. 쟝제스가 동북군의 장쉐량(张学良장학량), 서북군의 양후청(杨虎城양호성)에게 중공의 홍군을 토벌하라고 강요하니, 장쉐량과 양후청이 연합하여 쟝제스와 그 일행을 사로잡고 쟝제스에게 항일을 지도해달라고 요구한 사건이다. 한밤중의 총소리에 놀라 도망갔던 쟝제스를 산에서 찾아내어 업고 내려온 사람이 장쉐량의 경호부대 영장(대대장)이었던 당년 27세의 순밍쥬(孙铭九손명구, 1909~2000)로서 시안사변의 영웅으로 불린다. 그런데 항일을 목표로 한 사변에서 큰 공로를 세운 이 사람이 정작 항일전쟁에서는 일본괴 괴뢰정권에 붙어서 한간으로 되었다. 왜 그렇게 됐을까? 

 

장쉐량은 사변 12일 만에 쟝제스를 석방하면서 그와 함께 난징으로 돌아갔다. 쟝제스가 너그럽게 자신을 돌려보내면 미담으로 되리라고 천진하게 생각했는데, 시안에 갔던 중공 대표 저우언라이(周恩来주은래)가 날카롭게 지적했다시피 장쉐량은 전통극을 너무 많이 보아서 쟝제스의 독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전통극에서는 영웅호걸들이 서로 치고 받고 싸우다가 잡고 잡혔다가도 적당한 시점에서 놓아주고 화해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쟝제스는 결코 전통극에 나오는 영웅도 협객도 아니었으니, 장쉐량을 수십 년 억류했고 1975년에 죽을 때에마저 아들 쟝징궈(蒋经国장경국)에게 범을 놔줘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하여 쟝징궈도 1988년에 죽을 때까지 장쉐량을 풀어주지 않았으니 장쉐량은 1990년에야 타이완의 “총통” 리덩후이(李登辉리등휘)의 결정으로 자유를 회복했다. 12일 동안의 쟝제스 감금으로 53년 이상의 감금 및 연금생활을 한 장쉐량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사람이다. 2001년 100살을 일기로 미국에서 죽을 때까지 쟝쉐량은 대륙으로도 고향으로도 돌아오지 못했다. 

순밍쥬의 변절은 장쉐량의 운명과 직결된다. 장쉐량은 떠나면서 자신 부재중의 군권을 67군 군장인 왕이저(王以哲왕이철, 1896~ 1937)에게 맡겼다. 왕이저는 동북군에서 이른바 “주화파”에 속하는 사람이었는데, 쟝제스 석방 후 쟝제스의 중앙군이 걸음걸음 조여드는 상황에서 순밍쥬를 대표로 하는 36명 소장파들은 “주화파”들 때문에 장쉐량이 억류되고 동북군이 위험에 처했다고 단정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생으로서 일본식 정변에 익숙했던 순밍쥬는 소장파 두목들과 함께 또다시 총으로 해결하려고 마음먹었다. 1937년 2월 2일 왕이저는 총알 9발을 맞고 살해되었고 다른 고급장령인 허주궈(何柱国하주국)는 양후청의 보호로 암살을 면했다. 

 

▲ 소장파들에게 암살된 왕이저     © 자주시보, 중국시민

 

당시 소장파들은 중공이 나쁜 짓을 한다고 믿으면서 중공 대표들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권총을 뽑아든 청년군관들이 저우언라이의 사무실에 쳐들어가니, 저우언라이가 일어서서 높은 소리로 꾸짖었다. 

 

“뭘 하려는가? 이렇게 하면 장 부사령(장쉐량은 육해공군 부사령이었다)을 구출하여 되찾아올 수 있다고 여기는가? 아니다! 이렇게 하면 장 부사령을 해친다. 당신들은 단결을 파괴하고 동북군을 분열시킨다. 쟝제스가 하고 싶으나 하지 못한 일을 한다. 당신들은 범죄를 저지른다!” 

 

저우언라이는 뒷날 국제무대에서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화를 낼 때에는 굉장히 위엄 있는 사람이었다. 단 자제력이 엄청 강해 화를 쉬이 내지 않을 따름이었다. 저우언라이의 질책에 소장파들은 기염이 사그러들어 순밍쥬 일동이 저우언라이 앞에 꿇어앉아 사죄했다. 

그때 왕이저 암살을 중공이 사주했고 블랙리스트에 군장, 사장 이름들이 적혔다는 등 요언이 시안에서 퍼졌다. 저우언라이는 곧 부하들을 데리고 왕이저 집으로 가서 빈소를 차리고 추모했다. 그의 기민한 처사로 요언이 잦아들었다. 헌데 소장파 주모자들 처리가 난제로 떠올랐다. 소장파들은 워낙 왕이저와 허주궈 등 “주화파”만 죽이면 평화담판의 길이 막히고 중앙군과 한바탕 싸워 장세량을 구출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동북군에서 위망이 높은 왕이저의 죽음으로 오히려 소장파들이 공중의 적으로 되었다. 중앙군과 대치하던 부대들이 시안을 향해 오면서 순밍쥬 등 주모자들이 반드시 시안을 떠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2월 3일 양후청은 저우언라이와 상의한 후 순밍쥬, 정치처 소장처장 잉더턘(应德田응덕전, 1900~1980), 장쉐량의 비서였던 먀오잰츄(苗剑秋묘검추, 1902~?)를 불러다가 어떻게 하겠는가고 물었다. 그들도 당황해 어쩔 바를 모르다가 밤 새워 토론한 끝에 이튿날 세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첫째는 셋이 잘못을 시인하고 자결하는 것. 

둘째는 자수하여 남들의 처벌에 맡기는 것. 

셋째는 홍군 부대에 보내주는 것. 

복잡한 정세에 처한 저우언라이는 세 사람이 시안사변에서 공로를 세웠고 암살사건도 의도는 장쉐량 구출이었음을 감안하여 함부로 죽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하여 소장파를 비호한다는 혐의를 무릅쓰고 세 사람을 홍군이 주둔한 윈양(云阳운양)으로 보냈다가 후에 핑진(平津평진, 베이핑과 톈진을 합쳐 부르는 말)으로 보냈다. 세 주모자가 떠나니 왕이저의 원수를 갚으려는 사람들은 목표를 잃었고 따라서 동북군 내부의 대규모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2· 2사건”의 결과로 동북군의 군장, 사장들이 난징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으니 소장파들이 얼마나 안목이 형편없었느냐를 잘 알 수 있다. 

 

▲ 순밍쥬(왼쪽)과 잉더탠(오른쪽)     © 자주시보, 중국시민

 

그해 7월에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터진 다음 순밍쥬는 갈 길이 없었다. 톈진의 외국 조계지에 숨어있다가 상하이(上海상해)의 조계지로 옮겨 살던 그는 아예 왕징워이 정부에 달라붙어 한간으로 되었다. 1943년 봄에 괴뢰정부 참찬무관공서(参赞武官公署)에서 참찬무관으로 되었다가 같은 해 허난성(河南省하남성) 북부에서 무슨 특파원으로 일했고 이듬해에는 산둥성 괴뢰 보안부사령으로 승진했으며 동북군 부대들에 가서 귀순을 권고했다. 

항일전쟁이 끝난 다음 순밍쥬는 국민당에 항복했다가 동북에서 중공 군대에 사로잡혀 귀순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상하이시 정부에서 참사(参事)로 되었고 2000년에 91살을 일기로 병사했다. 중국 정부가 1950년대에 내린 결론은 항전 폭발 후 순밍쥬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굽은 길을 걸었다는 것이라 한다. 

 

1990년에 자유를 회복한 장쉐량은 보고 싶은 사람들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자 제일 먼저 순밍쥬를 거들었다 한다. 순밍쥬 또한 장쉐량의 소식을 듣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만년에 순밍쥬는 전국 정치협상회의 위원, 상하이 정치협상회의 위원 등 직위를 갖고 편안히 보냈는데, 그건 1936년 12월 12일 밤에 세운 공로를 중공이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먀오잰츄는 뒷날 일본에 가서 잡지를 꾸리다가 죽었다 하고, 잉더탠은 왕징워이 괴뢰정부에서 허난성 교육청 청장 직을 맡았는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시안사변에서의 공로 덕에 큰 고생을 하지 않다가 80살을 일기로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저서 《장쉐량과 시안사변(张学良与西安事变)》은 그 시기 역사연구에서 꽤나 중요한 자료로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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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워이, 메이스핑, 순밍쥬의 극과 극을 달린 인생을 알고 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학생운동, 노동운동 참여자 지어는 전설적인 지도자들이 뒷날 다른 극단으로 넘어가버린 현상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겠다. 대체로 시류에 따라 움직이던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굉장히 강경하거나 강성적인 입장을 드러내더라도 시류의 변화를 구실로 전날의 반대편으로 넘어가기 쉬운 법이다. 그리고는 전날의 경력을 들먹이면서 “내가 해봐서 아는데...”식으로 촛불시위를 비롯한 항거운동들의 가치를 폄훼, 부정한다. 우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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