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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가꿔가기 44] 국제적 명성이 높았던 문명자 기자를 다룬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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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7-08

 

누군가를 쓰려면 자료과잉도 골칫거리 

 

누군가를 다룬 전기를 쓸 때 자료가 없거나 부족하면 물론 무척 어렵지만 자료가 넘쳐나도 상당히 어려워진다. 우선 뭔가 새로운 것을 발굴하여 새로운 맛을 내기가 어렵다. 다음으로 그 사람의 언행에 대해 남들이 한 말, 쓴 글, 쓴 책들이 많으면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판단하기 힘들다. 셋째로 본인이 한 말, 쓴 글이 많고 자서전 성격의 자료도 남겼다면 더구나 그 일생의 대소사에 대해 외인이 이렇다저렇다 하기 어려워진다. 

정치인들나 경제인들의 전기를 대필해준 사람들은 받아쓰기와 허구, 가필로 돈벌이를 했다니까 별 말썽이 일어나지 않았으나, 명인의 전기나 평전을 쓴 사람들은 대상자나 그 가족 혹은 유족들과 마찰이 생겨 명예훼손 등 죄명으로 법정놀음까지 한 경우가 수두룩하다. 물론 반대로 전기나 평전을 극찬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그리고 누군가의 전기나 평전이 아니라 누군가를 모델로 하는 소설을 쓰려고 해도 자료부족과 자료과잉은 역시 어려움을 만들어낸다. 

수십 년 동안 국제 언론계에서 맹활약했던 우리 민족의 여류기자 문명자 선생은 수많은 명인들과 만났고 수많은 기사들을 썼으며 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1999)을 출판했고 자신의 일생을 돌이켰는데 필자는 언젠가 인터넷에서 읽어보았기에 글이던지 책이던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 문명자 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 자주시보,중국시민

 

하기에 전형적인 자료과잉 현상을 만들어낸다. 

1930년 경상북도 금릉군에서 태어나 2008년 미국에서 78살을 일기로 사망한 문명자 선생은 한국에서 “재미 교포 언론인”으로 정의된다. 숙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한국 전쟁 기간에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 메이지 대학 상학과를 거쳐 와세다 대학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했다는 학력부분, 와세다 대학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56년 한국 최대 여성지 《여원》의 도쿄 지국장으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해 1961년 《조선일보》 주미 특파원으로 워싱턴에 갔으며 《동아일보》,《경향신문》, MBC TV 특파원을 거쳤다는 등등 경력부분, 한국 출신 기자 최초로 중국의 덩샤오핑(등소평)과 조선(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했고 1965년에는 린든 존슨 미국 제36대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한국의 베트남 전쟁 전투병력 파병 방침을 전하는 등 여러 특종으로 명성을 쌓았고 줄리 문(Julie Moon)이라는 영어 이름은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 벅이 지어준 것이라는 등 명사들과의 교제부분들이 모두 인물사전 따위 자료들에 들어있다. 

또한 김대중 납치 사건 보도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비난 발언 등으로 신변 위협을 받게 되니 1973년 11월 미국에 망명을 신청했고 이 망명 신청은 미국과 일본의 주요 언론에 소개될 만큼 국제적인 화제가 되었으며, 1974년에 통신사 “유에스아시안뉴스”를 설립하여 주필로 지내다가 2008년 7월 2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생전에 미국여기자협회 부회장, 미국기자협회 이사를 역임하는 등 미국 주류 사회에 깊숙이 진출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거나, 1990년 남북고위급회담 이후 방북 취재를 시작해 1992년,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해 세계적 관심을 받았고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 평양을 방문, 조문하여 김정일 후계자를 만난 유일한 외부 언론인사로 알려졌으며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인터뷰해 내용을 월간 《말》에 기고했다는 주요한 활동들도 찾아보면 다 나온다. 

그리고 배우자는 동양통신 초대 워싱턴 특파원 최동현이고 아들 리처드, 딸 주리아가 있다는 개인정보도 공개되었다. 

그런데 위의 내용들만 보면 큰일들을 한 큰 인물임을 알 수 있을 뿐 인간상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본인이 쓴 글과 책들은 당연히 자신을 합리화, 정당화하였는데 남이 한 말, 쓴 글들에서는 이미지가 전혀 다르다. 예컨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구술하고 다른 사람이 정리한 《김형욱 회고록》에서는 문명자 기자가 형편없는 거짓말쟁이라는 식으로 매도했다고 기억된다. 

 

문명자 선생을 실제모델로 삼은 북의 장편소설 

 

세계 여러 나라들을 돌면서 수많은 정계 요인 및 그 가족들과 만나고 교류했던 문명자 선생이지만 그를 전문 다룬 책은 나온 것 같지 않다. 그를 실제모델로 삼은 조선의 장편소설 《녀기자》가 아마도 지금까지는 유일한 책이 아닐까 싶다. 조승찬 지음으로 된 《녀기자》는 문학예술출판사가 2016년 3월에 펴낸 293쪽 짜리 증보판이 필자의 수중에 있는데 초판은 언제 출판되었는지 몰라서 유감이다. 

 

▲ 장편소설 《녀기자》 증보판     © 자주시보,중국시민

 

소설에서 날카로운 필봉으로 “암독수리”라는 별명을 얻은 재미여류기자의 이름은 문명주다. 딸만 내리 낳아 구박받던 어머니가 또다시 딸을 낳아 시어머니의 괄세를 받던 판에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이름 높고 훌륭한 애로 키울 생각”(60쪽)이라면서 이름을 언니들처럼 정희, 옥희 “희”자 돌림이 아니라 명주라고 짓는다. 밝을 명자, 기둥 주자를 써서 문씨 가문에 기둥이 될 유명한 딸로 되라는 뜻이다. 

소설은 일곱 장과 마감이야기로 이뤄졌다. 

 

       제1장. 평양방문 

       제2장. 고학의 나날 

       제3장. 《암독수리》 

       제4장. 주영기 

       제5장. 부탁 

       제6장 다시 북행길에 올라 

       제7장. 어머니가 되고싶다 

       마감이야기 

 

1990년대 초반에 외사촌 오빠의 행적을 찾으려고 조선에 방문을 신청한 주인공이 베이징에서 허락을 받고 평양으로 들어가 전쟁시기 의용군으로 입북했던 외사촌오빠 주영기를 만나면서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조선의 현실을 새로이 알게 된다는 게 책의 골자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고 주인공의 삶과 주변 인물들의 인생이 엇갈리는바 김일성, 부쉬, 박정희, 노태우, 김형욱 등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면서 볼 재미가 있게 엮어졌다. 

책에 첨부된 종이에서는 내용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 세상의 온갖 불의와 악덕을 반대하여 정의의 필봉을 높이 들었던 주인공 문명주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의용군으로 북에 들어간 외사촌오빠가 생존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방문의 길에 오른다. 

그는 북의 여러 곳을 참관하고 사람들을 만나보는 과정을 통하여 더우기 ******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 ***의 접견을 받으면서 여직 남조선과 미국, 서방세계의 보수언론들이 떠드는 북조선에 대한 외곡선전이 얼마나 허황하고 터무니없는 비방중상인가를 깊이 깨닫게 된다. 

소설은 규탄과 타매, 질타의 뾰죽한 부리로 세상을 놀래우던 주인공이 어떻게 되여 경탄과 감사의 정이 차고넘치는 인간으로 되는가를 감명깊게 보여주고있다.”

 

조선을 오해하던 외부인이 조선을 방문하고 진실을 알게 된다는 것은 조선 문학예술작품들이 수십 년 수없이 다뤄온 주제이다. 어찌 보면 뻔한 얘기를 얼마나 흥미롭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엮느냐가 작품성공여부의 관건으로 된다. 

언젠가 읽었던 문명자 선생 자신의 서술에 의하면 1970년대 초반에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풀리면서 중국을 방문했었고 1979년 초에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을 만나면서 인연을 맺어 이듬해 베이징에서 덩샤오핑을 취재하게 되었는데, 덩샤오핑이 조선의 김일성 주석이 대단한 인물인데 방문하고 취재할 생각이 없느냐고 말했으나 자신이 그때는 저어했다 한다. 결국 방문은 1990년대 초반에야 이뤄졌는데 북에서 만난 옛 연고자는 조총련출신으로 문화와 대외교류분야에서 활약했고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까지 맡았던 장철을 언급하면서 일본에서 공부할 때 정견이 달라 다퉜었다고 회억했다. 북에서 친척을 만났다는 내용은 필자가 본 기억이 없다. 외사촌오빠는 소설가의 허구가 아니겠나 짐작된다. 

 

전환의 계기들을 보여준 작품 

 

저자는 주인공의 수십 년 인생에서 크고 작은 전환의 계기들을 그리는데 많은 품을 들였다. 시작부터 왜 세계가 좁다 하고 돌아다니던 유명기자가 북 방문은 하지 못하다가 어렵사리 오빠의 소식을 알아보게 되었느냐는 계기를 설명한다. 

어느 해 봄에 이모의 85돌 생일을 축하하여 서울에서 일가친척들이 모여 연회를 차렸는데 문명주가 미국에서 날아가 참가해 이채를 돋구어주었다. 이모는 문명주에게 네가 미국에 가서 대통령관저 출입기자로 명성을 떨치며 세계 안 가본 데가 없다고 떵떵거리는데 내 죽기 전에 북으로 간 네 오빠 소식을 알아봐 줄 수 없느냐고 묻는다. 아들소식이나 알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는 것이다. 하여 문명주는 얼마 후 중국을 방문할 때 조선 대사관을 찾아가 전쟁시기 입북한 주영기란 사람의 행처를 알아봐줄 수 없느냐고 문의했고, 베이징에서 국제박람회가 열리는 기회에 다시 방문하면서 대사관과 재차 연락한다. 오빠가 살아있을 뿐 아니라 건재공업부 부장으로 일한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한 그는 아예 방문을 신청하고 뜻밖의 허락을 받아 평양으로 날아가서 오빠를 만난다. 

 

북에 가지 않았던 미국기자의 방문, 이것이 작은 전환이다. 

뒤이어 크고 작은 전환들의 계기들이 그려지는 바, 주요한 것들로는 

광복 직후 진보적인 운동에 참가했다가 빠져나온 원인. 

전쟁시기 일본에 가서 고학하다가 언론기사의 힘을 깨닫고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 원인, 

《여원》의 특파원으로 일하다가 관계를 끊은 원인, 

미국으로 가서 일하게 된 계기, 

미국 국적을 갖게 된 계기, 

박정희, 김대중 등 인물들과 얽힌 계기, 

조선을 찬미하게 된 계기 등이 있다. 

조선 참모습 알기에서는 주영기와 옛 여고 동창생 부부 등을 통하는 연고자 방식 외에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읽기와 만남이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로 된다. 이런 설정이 실제 현실에 기초하는 건 맞지만 조선의 문예작품들이 하도 많이 써먹었기에 새롭지는 않다. 

 

문 선생의 서술과 소설의 묘사 

 

박정희, 김대중과의 인연은 문 선생 본인이 쓴 글과 두꺼운 책보다 내용이 훨씬 빈약할 수밖에 없는데 문 선생의 책 《내가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 한국인들에게는 흥미로웠을 “육여사와 함께 확인한 박정희의 평창동 주색잡기 안가”나 1972년 유신대통령 취임식에서의 에피소드 등은 전혀 거들지 않았다. 조선인민을 주요독자로 삼은 소설에 박정희의 추접한 이야기들을 넣을 필요가 없고 문 선생의 뼈 있는 농담도 자칫하면 이야기를 가로 새게 하여 주제가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유신대통령 취임식에 대해 문 선생은 이렇게 썼다. 

 

“내가 육여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유신 헌법에 따라 박정희가 제 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72년 12월 27일 취임식을 가질 무렵이었다. ... 

당시 나는 서울에 와 있었다. 바로 나흘 전에 있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개회식에서 박정희가 개회사를 읽던 중 대회장에 높이 솟아 있던 태극기 깃대가 부러져 "꽝"하는 소리와 함께 태극기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사건이 있었다. 그 얼마 전에는 육여사가 다니던 절에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절이 온통 불타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박정희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 아닐가 해서 유신정권은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나는 대통령 취임식장인 장충체육관에 도착한 후 이번에는 태극기를 어떻게 꽂아 놓았나 유심히 보았다. 아예 두 사람의 국군 병사가 손으로 태극기 깃대를 들고 있었다. 박정희와 육여사는 단상 위에 높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가슴에 훈장을 줄줄이 달고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 쪽으로 휘황한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전에 못 보던 모습이었다. 

취임식이 끝난 후 나는 육여사에게 말했다. "두 분은 드디어 덴노헤이까(천황폐하), 고구헤이까(황후폐하)가 되셨군요. "

그것은 물론 죽을 때까지 계속 대통령을 하게 된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빗대어 한 말이었다. 그러나 육여사는 나의 진의를 못 알아듣고 단지 휘황한 휘장을 두른 자기 부부의 모습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보았던 마지막 부분을 이번에 인용하면서 다시 읽으니 불통의 상징으로 돼버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둔감, 불감은 유전요소가 다분했다는 느낌이 든다. 

소설이 직접 인용한 건 박정희의 만주 신경군관학교 동창생들이 한 말이다. 문 선생의 챙에서는 이렇게 씌어졌다. 

 

“지난 72년 나는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 신경군관학교 동창생 두명이 도쿄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수소문 끝에 그들을 만난 일이 있다. 만주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키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 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같이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 어렵사리 만난 박정희의 두 동창생은 만군 시절의 박정희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박정희가 '벚꽃처럼 활짝 폈다가 한 순간에 떨어지겠다'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는 증언도 했다. 나는 그들로 부터 박정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어렵사리 입수했다.” 

 

소설에서는 1961년 5. 16후에 미국에서 주인공의 남편 최성욱이 박정희는 철저한 친일매국노라고 단언하면서 한국의 미래를 깊이 우려하고, 그로 하여 문명주가 박정희의 개인경력을 파보았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박정희에 대한 파악이 거의 없었다고 쓴 다음 동창생들의 말이 나온다. 

 

“남편의 말대로 박정희는 철저한 친일분자였다. 만주군관학교시절의 두 일본인동창생이 쓴 회상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씌여져있었다. 

《박정희는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도 없는 음침한 성격이였다. 그런데 래일 <죠센징 토벌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시,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군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 자식 좀 돌지 않았어?> 라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박정희가 사꾸라꽃처럼 활짝 폈다가 한순간에 떨어지겠다는 내용의 혈서도 쓰고 일본왜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편지도 썼다고 증언을 했다. 그런자가 정권을 가로챘다니 문명주는 어쩐지 불안했다.》”(122쪽)

 

하나의 내용이나 사건에 대해 문명자 선생의 책과 소설이 어떻게 다뤘는가를 비교하는 것도 의미 없는 노릇은 아니겠다. 박정희와의 첫 만남과 두 번째 만남을 문명자 선생은 책의 제1장 “워싱턴 내셔널 공항의 박정희 소장”에서 이렇게 썼다. 

 

“제 1장 - 워싱턴 내셔널 공항의 박정희 소장 

 

박정희와의 첫 만남 

박정희가 5. 16 쿠데타 이후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것은 61년 11월 13일의 일이다. 이 방문을 성사 시키기 위해 박정희는 사활을 걸고 대미 로비를 벌였다. 이것은 그가 미국을 방문하기 전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던 민주당 전 총리 장면을 석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꼭 20년 후인 80년 5. 17 쿠데타(79년 12. 12를 말함)로 집권한 전두환이 김대중을 석방하기로 약속하고 미국에 온 것도 그 전철을 되밟은 것이라 하겠다. 

박정희가 도착한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영접사절로 나간 것은 부통령 존슨이었다. 존슨이 공항에 나가게 되기까지 과정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박정희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이 바로 그 때였다. 박정희는 바지선도 세우지 않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서울 온 촌놈처럼 잔뜩 경직된 모습이었다. 박정희가 백악관에서 케네디를 만난 후 주미 대사관에서 열린 리셉션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박정희와 악수를 나눴다. 나는 말했다. 

"박의장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

옆에 있던 정일권 주미대사의 눈이 둥그래졌다. 문명자 입에서 무슨 독설이 나오는가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했다. 

"색안경을 쓰고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만난 것은 큰 실례인데요. 자신감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 아닙니까?"

정일권 대사가 아연실색해서 도중에 내 말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박정희가 되물었다. 

-"문명자 기자님이라고 그러셨죠? 고맙습니다. 제가 깜빡 했습니다. 그렇게 실례가 됩니까?"

"미국에서는 그렇습니다. 내일부터는 벗으십시오. "

박정희는 정일권 대사에게 물었다. 

-"문 기자는 경상도 분입니까?"

내가 대답했다. 

"네 대굽니다. "

내가 박정희를 두 번째 만난 것은 63년 케네디가 암살된 후 박정희가 대통령 당선자로서 장례식 참석차 미국에 왔을 때였다. 외국 원수로의 제일 먼저 워싱턴 댈러스 공항에 도착한 것은 프랑스의 드골이었다. 그 무렵은 미. 불 관계가 좋지 않을 때여서 공항에 나와 있던 기자들은 드골에게 미. 불 관계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그런데 드골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무게가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하러 온 사람에게 미. 불 관계가 다 뭐냐? 노코멘트"

이것이 선례가 돼서 이후 속속 댈러스 공항에 도착한 세계 각국의 국가원수들은 애도의 표시로 아무도 코멘트 없이 조용히 미국 땅을 밟았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서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은 물론 교민들까지 공항에 동원해 태극기를 흔들며 자기 나라 국가원수를 열렬히 환영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었다. 이 추태를 보며 나는 박정희의 미국 도착 기사를 [조선일보]로 타전했다. 

"오늘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가 댈러스 공항에 도착했다. 61년 11월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이 곳 미국에 와서 정권을 민정으로 이양하고 자신은 군의 본분을 지키겠노라고 약속했던 그였다. 그런데 그런 약속을 받은 케네디는 저격으로 서거했고, 그런 약속을 한 사람은 대통령 당선자로서 그의 장례식에 참석차 댈러스 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무릎까지 쌓인 눈 속에서 진행되었던 케네디의 취임식. 세계가 열광했던 그의 취임식에 참석해 나는 그의 말대로 "한국에도 민주주의가 찬란하게 꽃필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미국의 본질을 제대로 몰랐던 나의 순진함 때문이었겠지만 당시 케네디의 죽음을 비통해 했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케네디의 장례식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군홧발로 짓밟은 조그만 사나이를 지켜보는 심정이란 대체 어떠했을 것인가.”

 

소설에서는 두 차례의 만남이 이렇게 그려진다. 

 

“그의 신경은 점점 더 험악해지는 서울정국의 변화와 움직임 그리고 그에 대한 미행정부의 태도를 두고 신경이 날카로와지고 있었다. 표면상 당시 서울주재 미 대사관과 미8군사령관은 《군사정변 반대성명》을 내여 마치 미행정부가 《합헌정부》를 지지하는 듯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것이 사실일까? 박정희를 받아들이는 이 사실자체가 미국이 공개적으로 서울의 《군부정권》을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마침내 박정희가 워싱톤에 도착하는 날이 다가오자 문명자는 동료들과 함께 비행장으로 나갔다. 비행장에는 마중나온 미행정부의 관리들과 이곳 주재 남조선대사고나의 관헌들 그리고 그 가족들과 각국 기자들이 나와 붐비고 있었다. 

드디여 비행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면서 자그마한 키에 얼굴이 강마르고 가무잡잡한 사나이가 색안경을 끼고 승강기계단으로 주춤주춤 내려오고 있었다. 박정희였다. 자세히 보니 바지주름도 잡지 않은 후줄근한 차림인데 미국정객들과 만나 인사하고 어쩌고 하는 것이 서먹서먹하고 어색해하는것이 마치 서울에 온 촌닭 한가지였다. 

(고국의 대표자라는 자의 몰골이 왜 저 모양인가?) 

저따위 자식 때문에 내 고국의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치밀어올랐다. 그는 당장 달려가 처신을 바라하라고 충고라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남의 나라 행사장에 와서 무리하게 행동할수도 없어 괜히 속만 요글요글 끓이고 있었다. 

이날 그는 박정희를 만날 수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미국 관리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곧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 백악관으로 갔기 때문이였다. 

다음날 박정희는 주미 남조선대사관에서 연회를 차렸는데 문명자도 초대되였다. 박정희를 만날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가 연회장에 가 대기하고 섰는데 역시 색안경을 낀 박정희가 방에 들어섰다. 그가 자기 앞으로 다가오자 문명자는 한걸음 나섰다. 

《박의장님, 반갑습니다.》 

그는 례의는 지켜 깍듯이 인사했다. 그러자 박정희가 무춤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이곳 대사가 낯빛이 새까매지며 당황해하였다. 문명자의 도끼입에서 무슨 독설이 튀여나올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러거나말거나 문명자는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색안경을 쓰고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만나는것은 실례입니다. 자신감이 없어 그러는 것은 아닙니까?》 

대사는 아연실색하며 그의 말을 가로막으려고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박정희가 애써 태연한 기색으로 침착히 물었다. 

《문기자님이라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의장님!》 

《제가 그만 깜빡 잊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렇게 실례가 되는가요?》 

《서울에서는 몰라도 여기서는 그렇습니다. 래일부터는 벗으십시오.》 

박정희는 랭정하게 나무라는 문명자는 보지 않고 대사에게 물었다. 

《문기자는 경상도출신이라고 했지?》 

《예, 대구입니다.》 

대사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문명자가 대꾸했다. 경상도출신이면 어쨌단 말인가. 동향이라니 그 무슨 공통점이라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자는 것인가. 

문명자는 속으로 흥 하고 코웃음쳤다. 

박정희는 더 지체하지 않고 연회장 주빈석으로 나갔다. 더 있었댔자 사나운 부리에 할퀴우는 것 밖에 더 다른 것이 없으리라 생각하였는지 모른다. 

이날 연회가 끝날 무렵이였다. 문명자는 기회를 보다가 박정희에게 바투 다가갔다. 

《의장님, 군은 언제까지 정권에 들어앉아있을 생각입니까?》 박정희는 약간 놀라는듯 하더니 눈을 치뜨며 침착히 그를 바라보았다. 문명자는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문기자, 너무 걱정마시오. 군은 정국만 수습되면 곧 정권을 민간인들에게 이관하고 군본래의 위치로 돌아가겠습니다.》 

박정희의 천연스런 대답이였다. 

문명자는 도리여 떨떨해졌다. 

(이게 사실일가?) 

장내에서는 벌써 사람들이 처럭처럭 박수까지 치고 있었다. 연회장은 순간에 화기로운 분위기에 휩사였다. 정국이 수습되면 《정권》을 민간인들에게 이관하고 군부세력은 군본래의 위치로 돌아간다는 박정희의 말이 연회장에 모인 숱한 사람들에게 환희와 기쁨을 안겨주었다. 

문명자도 일단 박정희에게서 그런 대답이나마 듣고나니 기다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짜든 가짜든 만장 앞에서 한번 내뱉은 말을 그렇게 쉽사리 뒤집어엎을가?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는 이듬해에 자기의 공약을 헌신짝처럼 뒤집어버렸다. 《대통령》이란 권력의 자리에 들어낮은 것이였다. 

문명자는 또한번 그놈에게 속히웠다. 아니, 민주주의를 그토록 갈망하는 이남민중 전체가 박정희의 침발린 소리에 넘어갔다. 박정희가 이미 권로술수의 능수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뻔뻔스럽고 파렴치할 줄은 몰랐다. 분하였다. 그에 대한 한가닥의 기대나 미련은 깨끗이 사라졌다. 오직 진실만을 파헤쳐 그놈의 정체를 발가내자, 문명자는 이렇게 결심했다. 

이러는데 미국에서 케네디암살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세계가 물끓듯 끓어번졌다. 그때 각국 수반들이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워싱톤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제일먼저 미국에 도착한 사람은 프랑스대통령 드골이였다. 키가 크고 몸이 갈람한 그는 비행기에서 내려 영접나온 정객들을 만나고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로 다가가는데 기자들이 우르르 쓸어들어 마이크를 들이댔다. 

《각하, 미프관계가 장차로 어떻게 될것 같습니까?》 

《락관적인가요, 비관적인가요?》 

당시 두 나라간에서는 사이가 좋지 않아 자주 마찰이 생겨 각국 기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관심하의 하나로 되고 있었다. 

드골은 벌컥 화를 내였다. 

《장례식참석차로 온 사람에게 미프관계가 뭐요? 기자인터뷰 없소.》 

이것이 전례가 되여 이후 속속 들이닥치는 세계 각국 수반들은 애도의 표시로 일체 기자회견없이 조용히 미국 땅을 밟았다. 

그런데 박정희가 올 때였다. 그날 박정희는 남조선의 《대통령》감투를 쓰고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대사관관헌들은 물론 그의 가족들과 동포교민들을 긁어모아 기발을 내흔들면 그를 환영하게 했다. 그 추태를 목격하며 문명자는 기가 막혔다. 레바논출신의 미국인동료기자 헬렌은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명자는 얼굴이 뜨겁고 창피하여 그 자리에 서있을 수 없었다. 초보적인 례의도 도덕도 모르는 무뢰한의 해괴망측한 행위였다. 

(너절한 자식!) 

그는 고국의 정객들이 모두 저 모양이란데 환멸을 느꼈고 민족적 수치감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돌아오는 길로 이 추태를 기사로 써서 본사에 타전했다. 

《오늘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가 댈러스 비행장에 도착했다. 61년 11월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이곳에 와서 <정권>을 민정으로 이양하고 자신은 군의 본분을 지키겠노라고 약속하였던 그였다.》 

이렇게 시작한 기사는 박정희가 공약을 줴버리고 《대통령》자리에 들어앉아 사소한 민주주의적 요소도 가차없이 짓뭉개버리고 파쑈의 폭거를 감행하고 있다는 것이며 남의 나라 장례식에 와서 저지른 추태에 대하여 낱낱이 까밝혀 폭로하였다. 기사는 많은 부분이 삭제되고 날카로운 비평의 표현들이 바꾸어졌으나 어쨌든 세상에 공포되였다. 

청와대에서는 펄펄 뛰였다. 언론매체들에 대한 검열과 뒤조사가 심화되고 의심되는 기사나 그것을 편집한 기자나 편집원들이 줄줄이 련행되여 문초를 당하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기사가 제대로 나가지 않은데 대해 항의하려고 본사에 전화를 걸었던 문명자는 편집자의 뜻밖의 대답에 와뜰 놀랐다. 

《말마세요. 지금 여기서는 사람들이 숨도 못 쉬고 있어요. 선배님의 그 기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곤욕을 당하는지 알아요?》 

그는 더 항변할 말을 찾을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자리에 앉으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조만간에 자기에게도 탄압의 촉수가 미쳐올 것이다. 어쩐지 불안스러웠다. 그러나 그 불안보다 사태의 진상을 까밝힐 수 없도록 언론인들의 입에 자물쇠를 채우려는 당국의 처사에 더 큰 분노를 느끼였다. 

(물러설 수 없다.) 

그는 강심을 먹고 일어섰다. 그러나 그의 기사는 번번히 기각되여 쓰레기통에 들어가든가 뒤전으로 밀려났다.”(125~ 129쪽)

여러 해 뒤 베트남전쟁이 악화일로로 가던 1968년 4월 18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진행된 박정희- 죤슨 회담에 대해서 당시 《경향신문》 주미 특파원으로서 죤슨 대통령을 수행해 정상회담 하루 전에 하와이에 도착했던 문 선생은 책에서 미국 양대 전신회사의 하나인 ITT사가 한국 기자들을 위해 채용한 통역자- 한인교포 여성과의 만남에 이어 이렇게 썼다. 

 

“이야기 하는 동안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다. 모두들 공항 건물로 달려들어갔다. 그 중년 교포여성은 "하와이 기후는 이맘때면 청천벽력처럼 소나기가 확 퍼붓다가 곧 언제 비왔냐는 듯이 활짝 개인다"면서 '이런 일이 하루에 몇 번씩 있다' 고 했다. 곧 그녀가 말한대로 해가 나기 시작했다. 이 때 박정희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다. 

환영 영접식이 간단히 끝난 다음 존슨 대통령은 회담장소 겸 숙소인 록펠러 일가의 별장으로 갔고, 박정희 일행은 카하라 힐튼 호텔로, 한국 기자들은 프레스 센터가 있는 '이리가이 호텔'에 가서 각각 짐을 풀었다. 존슨 수행원들과 미국측 기자들도 이 호텔에 묵었다. 박정희 일행이 묵은 카하라 힐튼은 와이키키 해변 중에서도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은 하와이 최고의 호텔이었다. 

특히, 이 곳은 일류 불란서 요리사들을 두고 식도락을 즐기는 손님들을 즐겁게 했기 때문에 항상 세계 갑부 손님들로 초만원이었다. 이리가이 호텔 프레스 룸에 들어가니 한국 수행기자들은 하나도 없고 미국 기자들은 '도착. 전망' 기사 쓰기에 바빴다. 나 역시 기사를 쓰고 있는데 조선일보의 선우연 기자가 와서 말을 걸었다. 

-"문 선배, 한국서 수행 온 우리 기자들은 대표를 선정해서 그를 통해 일괄해서 보내기로 되었습니다만, 이것만은 내가 별도로 특종기사를 보내야겠는데 영역하는 걸 좀 도와주십시오. ""무슨 특종 기사인데요?"

그가 내미는 기사 내용을 보니 기가 막힌다. -"하늘도 박대통령을 알아보는지 박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착륙 하자마자 소나기가 멈추고 햇빛이 비치면서 그를 환영했다. "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것 봐요. 요즘 하와이 날씨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비가 왔다 해가 났다 한대요. "

선우 기자의 대답이 더 걸작이었다. -"한국 독자들이 하와이 일기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는 '이 기사는 저 혼자 보내는 것이나 딴 기자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 고 당부했다. 그런데 이렇게나마 기사를 보낸 사람은 40여 명의 수행기자 가운데 선우 기자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한국에 발송된 기사는 청와대 수행 기자단 중에서 당번을 맡은 기자가 국제 전화로 청와대 기자실에 대기 중인 서울 당번에게 불러주면 그가 그것을 받아써서 각 사에 배부하고, 각 사에서는 그 기사를 각 사 스타일로 다시 써서 수행기자의 이름을 달아 싣는 식이었다. 

박정희가 65년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각 신문사 기자들은 제각기 기사를 보냈었다. 이런 전례가 있었고, 또 세계 어느 나라 언론이라도 기자라면 각자 자기가 취재한 기사를 보내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에 RCA와 ITT 두 회사에서는 그런 거창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어쨌든 68년 한. 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두 전신회사는 내내 헛탕만 치고 말았다. 

4월 18일 미국 대재벌의 하나인 로렌스 록펠러 씨의 하와이 별장에서 박정희. 존슨 회담이 열렸다. 회담장 주변에는 존슨 대통령 경호원들과 1백여 명의 주정부 경찰관들이 동원되어 철저한 보안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백악관 측은 기자들의 편의를 위해 별장 입구에 특별 전화를 가설했다.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당시 미국의 소리 방송에 파견 근무 중이던 한 KBS 아나운서가 이 전화에 대고 방송하는 보도 내용을 듣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4월 18일 오전 10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는 한. 미 정상회담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앞선 4월17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 일행이 하와이에 도착 했을 때 30만 시민이 손에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면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을 환영했습니다…… "

하도 기가 차서 그에게 쏘아 붙였다. "이거 봐요. 어쩌면 그렇게 거짓말이 입에서 술술 나오지?"

그는 멋쩍은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떡합니까? 그렇게라도 해야지. 기사 보낼 것이 뭐 있어야지요. "

이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KBS 중계 전파를 타고 한국 국내 청취자들에게 전달되었음은 물론이다. 4월 18일 회담에서 존슨은 비공개리에 박정희에게 월남전에 추가 병력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우리 기자들은 그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이 부분은 비공개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확증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회담이 끝난 후 이 사실이 한국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다. 정보를 한국 언론에 흘린 주범은 미국 공화당측 인사로서 타이완의 로비스트인 엔나 셰놀트였다. 그녀는 당시 미국 내의 반전 무드에 편승해 존슨에게 타격을 주어 그 해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과 친한 정일권에게 존슨의 추가병력 요청 사실을 흘렸던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 부분이 아래와 같이 그려졌다. 

 

“이무렵 하와이의 호눌룰루에서 죤슨과 박정희의 회담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문명자는 동료들과 함께 현지로 떠나갔다. 하와이의 날씨는 변덕스러워 하루에도 몇번이고 개였다가는 비가 내리군 하였다. 그가 현지에 도착하니 서울에서도 숱한 기자들이 선발대로 와있었다. 숙소에 들려 짐을 풀어놓고 비행장으로 나가 기다리고 있는데 본사에서 온 한 기자가 그를 보고 반가와했다. 

《선배님, 반갑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그는 제잡담 문명자를 붙어잡고 용건부터 터놓았다. 한때는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쟁쟁한 기사를 써내여 기대가 촉망되던 기자였다. 

《뭘 도와달라는거예요? 우리도 방금 도착했어요.》 

《선배님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서울에서는 40명의 기자가 왔는데 그들은 대표로 선정된 한사람의 견해에 따라서 일괄하여 기사를 보내게 지시되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은 특종기사여서 별도로 보냈으면 합니다.》 

장씨겅을 가진 그 가지는 품속에서 원고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문명자는 그걸 받아 대충 훑어보았다. 특종기사라 하여 무슨 새 소식인가 했더니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였다. 그는 원고를 내흔들며 분노를 터뜨렸다. 

《<박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착륙하자 소나기가 멎고 해빛이 비치면서 그를 환영했다.>고... 이봐요, 하와이날씨는 하루에도 열두번 변해요. 이런 거짓말을 어떻세 써요?》 

《서울사람들이 하와이날씨를 알기나 합니까?》 

장씨는 도리여 제쪽에서 볼이 부어 투덜거렸다. 어이가 없었다. 국민이 모른다면 이런 새빨간 거짓말도 꺼리낌없이 할수 있다는 그자의 뻔뻔스런 사고방식이 증오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사람도 한때는 남조선 사회의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필봉을 날렸다는 것이 좀체로 믿어지지 않았다. 군부의 강권력에 언론이 이렇게도 타락되였는가? 

그런데 이번에는 《KBS》방송원이 그를 또한번 놀라게 하였다. 한참 회담이 진행될 때인데 편의를 위해 특별히 설치한 전화에 대고 방송원이 4월 18일 오전 10시 하와이 호눌룰루에서는 남조선과 미국사이의 정상회담이 열렸다고, 이에 앞서 4월 17일 박 《대통령》일행이 하와이에 도착하였을 때 30만시민이 손에손에 기발을 들고 열렬히 환영했다고 목청을 높여 전하고있었다.  

문명자는 그를 향해 달려갔다. 

《어쩌면 그런 거짓말을?!... 방송원이 국민 앞에 거짓말을 하면 됩니까?》 

《별수 있습니까? 그렇게라도 해야지 기사 보낼것이 뭐 있습니까?》 

《미국의 소리》방송은 조선말방송으로 이 사실을 그대로 내보냈다. 그리고 이날 회담에서 윁남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대해서도 요란스레 광고하였다. 언론이 이렇게 썩어문드러지면 사회는 만신창이 되고 만다.”(133~ 134쪽) 

 

대통령이 어느 나라를 방문하자 현지 날씨도 좋아졌다는 따위 기사는 1980년대 전두환 시기에도 이어졌다 한다. 미리 써두었다가 발표했다던가. 한국에서 “기레기(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의 존재는 결코 어제오늘일이 아니라 적어도 반세기 역사를 가졌다. 지금도 보수언론들의 보도는 제목만 봐도 소속사를 알아맞춘다는 네티즌들이 수두룩할 지경으로 색깔이 분명하고 왜곡이 심하다. 적폐들 중에서 가장 청산하기 힘든 적폐가 언론적폐가 아닐까? 

 

문명자 평전을 기대 

 

장편소설 《녀기자》는 다루기 상당히 어려운 인물과 소재를 갖고 저자가 많은 품을 들여 쓰고 수개한 역작으로서 자연히 가치를 갖는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서 안겨오는 문명주의 모습은 문명자 선생 본인의 책과 글들이 전해주는 모습과 거리가 꽤나 멀다. 허구가 허용되는 소설이더라도 그 차이는 필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지경으로 크다. 

문명자 선생은 현대사와 깊이 얽혀져 한국에서 “반체제인사”로 분류되다가 말년에는 “친북” 딱지가 붙여졌고, 사망 후 조선의 모 단체가 유족에게 조전을 보낸 것도 친북의 증거로 충분하다. 

음악가 윤이상 선생처럼 무덤 옮기기 따위로 새로운 논란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는데 세계를 주름잡던 여중호걸치고는 사후가 좀 쓸쓸하다는 느낌이다. 한국에서 누군가 소설 아닌 평전을 쓴다면 언론인들에게 상당한 참고가치가 있겠다. 필자 알기로는 문명자 만큼 큰 범위에서 활약한 우리 민족 기자는 그전에 없었고 그 뒤에도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시대가 많이 변해 개인의 힘으로 특종기사, 단독보도, 심층보도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해졌고 단합된 팀의 힘으로 비밀을 파헤치는 게 관례다. 최순실 게이트 폭로가 바로 전형적인 사례다. 그러나 새 시대에도 험하지만 바른 길을 걸었던 언론계 선배는 시사해주는 바가 많을 테고 그런 선배를 제대로 연구한 책이 없다는 건 한국 언론계 나아가서는 한국 학계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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