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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식의 북녘생활] 결국 돈 문제로 탈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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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식
기사입력 2018-09-04

 

제가 글을 올리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왜 탈북하게 되었는가.

남녘에 3만 명의 탈북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탈북 동기는 각자가 다르겠지만 저는

그곳에서 도저히 배겨날 수 없을 정도로 사람구실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북녘에서 생활제대(남녘 불명예제대와 비슷)를 한 인간은 사회의 시선이 아주 안 좋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인생의 첫걸음부터 삐딱하게 떼였으니 저로서는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누구와도 마주치기 싫었고 말하기도 싫었습니다.

물론 배치 받은 직장도 출근하는 날보다 안 나가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마침 고난의 행군시기라 식량구입 때문에 결근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저도 식량구입 간다거나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서 일할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생각해보면 그 당시 제가 정신을 차리고 하루에 죽 한두 끼로 생활하면서도 생산계획을 완성하려고 혼신을 다하던 수많은 이들과 함께했더라면 어쩌면 인생이 달리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북녘에는 저처럼 생활제대나 범죄를 저질러 교화소(남녘교도소)를 갔다 온 사람들도 새롭게 출발하여 노력영웅도 되고, 당원도 되고 간부까지 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리 부러진 노루 한곳으로 모인다고 동네에서 사람들 손가락질 받는 두세 명의 인간들하고 어울려 다니면서 새롭게 살기를 거부하였지요.

저 때문에 속이타서 한숨만 쉬던 부모님들과 부모님들 얼굴에 먹칠한다고 꾸짖던 마을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저를 괴롭힙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시간이 흐르니 군대 나갔던 동창생들과 선후배들이 표창휴가, 또는 일 때문에 출장 가다가 고향땅에 올 때였습니다.

특히 동창생들이 저의 부모님께 인사하러 올 때나 위로한다며 나를 찾아 올 때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딴 고장으로 이사 가고 싶었고 직장을 먼 곳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반대를 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헛세월을 보내던 중 어떻게 되어 중국에 친척이 있는 어떤 사람이 불법으로 중국으로 넘어가 돈을 적지 않게 벌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생각한 것이 이럴 바에는 나도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헛꿈을 꾸게 되었고 외할머니로부터 중국에 있는 자매분의 주소를 알아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부모님들이 그걸 알고 결사반대하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사람구실 좀 하라고 사정하다 싶이 했지만 제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머리 속에는 다른 생각 뿐 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집안사정도 아주 안 좋았습니다.

 

어머니가 직업이 명색은 식량공급소 공급자인데 식량공급이 몇 년 째 없다 보니 시래기죽으로 하루 두 끼씩 떼워 가는데 참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식량공급 할 일이 없어져버린 어머니가 그나마 두부장사라도 하였기에 다른 집보다는 사정이 괜찮은 편이였습니다.

 

어차피 인생첫걸음부터 꼬였는데 불법으로 중국을 갔다 온다고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것이 당시 생각이었습니다.

남녘으로 오게 된 탈북자들 중 처음부터 목적지가 남녘인 탈북자들은 얼마 되지를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부모님들이 하도 반대를 하여 말도 안하고 아는 사람과 함께 중국으로 불법 월경하여 넘어가보니 당시로서는 딴 세상에 온 것 같았습니다. 일단 친척을 찾아보았지만 오래전에 다른 곳으로 떠난 후라 찾을 길은 없었고 여러 사람을 겪게 되다 보니 밀수조직에도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밀수는 세계 어느 나라든 불법이고 범죄행위입니다. 하지만 당시 북녘에서는 어려운 시기라 불법월경자들, 경미한 밀수범들은 거의가 법적처벌을 하지 않고 용서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남녘 TV에 출연하여 마치도 큰 공을 세운 것처럼 북녘에서 밀수입한 것을 자랑하고 그곳 사람들이 모두가 그런 것처럼 말하는 걸 보니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제가 남쪽 행을 결심하게된 것은 중국공안에 붙잡혀 신의주로 북송된 후 다시중국으로 넘어간 뒤였습니다.

신의주에 있는 불법월경자들 집결소로 도착해보니 그곳에서는 관리자들인 보안원들이 월경자들 거주지에 전화하여 신분확인을 하게 되면 가족이나 월경자가 속해 있는 조직에서 데리러오도록 조취를 취했습니다.

저처럼 초범은 데리러 사람이오면 바로 나가게 되는데 신의주가 집인 월경자는 다음날 바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재범일 경우에는 그곳에서 짧게는 3달 길게는 6달 정도 노동단련을 하고 내보냅니다.

이미 한번 신원확인이 되였기에 몇 달 노동단련 시키고 내보냅니다.

그곳에서만 최고기록이 6번이나 되는 사람도 보았고 반 이상은 2번이었습니다.

 

그곳 보안원들은 월경자반이상이 그곳에 두 번 이상 들어오는 인간들이라 신입들이 들어오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까지 된 월경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녘으로 오니 언론에서는 북송당하면 정치범수용소행에 운이 나쁘면 사형당한다고 하고 또 그런 거짓말을 교회나 방송 나가 눈물, 콧물 짜내며 간증, 증언하는 탈북자들 보니 욕만 나옵니다.

 

저는 아버지가 데리러 왔는데 함께 나가 걸어가면서 한마디 말도 없이 담배만 피우며 한숨을 내쉬던데 그 순간 부모님들께 참으로 미안하고 죄송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돌아가서 사람구실 좀 해보며 살아보겠다고 이야기했더니 담배와 라이터를 제 손에 쥐어주며 앞서 걸어가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못 받은 돈이 있었는데 당시 중국 돈으로는 얼마 안 되었지만 북녘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집에 도착하여 어머니를 만난다음 친척집에 다녀오겠다는 거짓말을 한 후에 다시 중국으로 와보니 돈을 주어야 할 그 중국인도 제가 잡힌 후에 공안에 잡혀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가기도 그렇고 하여 고민하던 중 어떤 미국 교포인 교회장로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남쪽에 가서 몇 년 돈 벌어가지고 여권 만들어 다시나오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선택은 저에게 있었으니 제가 거부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겠는데 몇 번은 거절했으나 마침 탈북자들 스페인 대사관 난입사건이 터져버려 대대적인 탈북자 검거가 일어나는 판이라 다시 잡힐 상황이 되어버리니 결국에는 그 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의 글에서 보다 싶이 확실하게 저는 북녘 사회에서 올바르게 살았던 인간은 아닙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 나가서도 샌다고 남녘에 와서도 올바로 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올바르지 못한 인생을 살더라도 저를 참되게 살아가라고 가르쳐주던 그 사람들과 부모님들이 있는 그 땅을, 저 같은 인간에게도 정다운 눈빛과 가식 없는 진심이 담긴 웃음을 지어주던 그 좋은 분들이 살아가는 그곳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뒤돌아보니 흘러온 그 세월은 저를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해주더군요.

그나마 중년나이에라도 정신을 차린 걸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 마음속에 가득 쌓인 죄책감은 죽을 때까지 안고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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