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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일침 599] 보천보 전투, 북이 1960년대 후반부터 의미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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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시민
기사입력 2019-06-17

 

홍콩의 법률수정과 관련하여 빚어진 사태를 한국 언론들은 비교적 소상히 보도했는데, 빼놓은 내용이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위대의 부상만 부각시키면서 경찰의 부상을 무시한 것이고, 하나는 법률수정을 지지하는 서명자 수가 근 100만 명에 이르러 수정반대 시위 측이 추산한 시위참여자 100만보다 실질적으로 훨씬 많은 것, 하나는 그동안 살인자마저 제대로 처벌할 수 없는 문제의 법률이 영국 식민지 통치 말기인 1997년 초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일부 한국인들은 반중국 감정이 앞서거나 단순한 민주화 시위로 간주하여 홍콩 시위대를 지지하는 모양인데, 사태는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또 일부 한국인들이 바라는 것처럼 중국의 대규모 시위 내지는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 인터넷을 통해 드러나는 중국인들의 민심은 조소가 주류를 이룬다. 연간 연인원수로 1억 명이 출국하고 해외 거주자들이 중국어 사이트와 웨이보 등에서 활약하기에 중국인들이 “공산당 언론”에 통제되거나 세뇌되었다는 설은 통하지 않는다. 올해 초 집계에서 선전시의 GDP가 사상 처음으로 홍콩을 초과했는데, 10년 전만 해도 선전의 GDP는 홍콩의 절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내지 사람들이 일하는 동안에 홍콩인들이 시위나 하면 홍콩의 미래가 암울할 수밖에 없다는 풍자가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다. 

 

15일 홍콩 당국의 최고지도자인 장관이 법률수정을 연기한 데 대해 한국 언론들은 서방언론들과 엇비슷하게 민주의 승리와 당국의 굴복 내지는 항복 정도로 해석하던데, 홍콩의 《따궁바오(大公报)》같은 매체들은 당국이 수정 의도를 철회하지 않겠다고 밝힌데 역점을 둔다. 현존 법률대로는 타지나 타국에서 살인죄까지 포함되는 중범죄를 저지르고 홍콩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을 제대로 처벌할 수 없거니와, 홍콩에서 중범죄를 저지르고 타지나 타국으로 도망간 사람들도 제대로 처벌할 수 없다. 홍콩이 “도주범의 천국”이라는 오명을 벗으려면 법률 수정은 불가피하다. 민주를 표방하는 홍콩 독립파들이 중국 내지의 법제를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극렬시위를 벌이는 게 계속 먹혀들기는 어렵다. 침묵하던 다수가 서명 정도에 그치지 않는 경우, 민의표현은 극렬시위대만의 특허가 아니다. 

 

법률문제는 이제 두고 보면 알 것이라, 섣부른 예언을 할 필요는 없다. 단 홍콩 사태를 둘러싼 한국 언

론들의 보도 누락으로 하여 《조선의용대원 80%가 결성한 조선의용군, 北인민군의 뿌리가 됐다》는 모 대형일간지의 기사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고, 다른 생각도 하게 되었다.  

 

홍콩사태 관련 보도들이 문자와 사진을 결합하여 다량의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보여주지 않은 게 있다시피 모 대형일간지의 심층 기사도 연도와 인물들을 제법 상세히 열거하면서 역사를 밝히는 듯하면서도 교묘한 취사로 역사 사실과 어긋나는 결론을 얻어냈다. 그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김원봉이야말로 조선인민군의 뿌리라는 인상을 받기 쉽다. 김원봉을 연구한 사람들이 많으나, 여태까지 그렇게 유도한 글은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때문에 그런 기이한 글이 나왔으니 참으로 희한하다. 

 

[정문일침 598] 일본의 F35, 한국의 김원봉(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45890&section=sc51&section2=)에서 지적했다시피 조선의용군은 김원봉과 갈라진 의용대 출신들을 토대로 만들었고 김원봉과는 조직적, 사상적으로 연관이 없다. 대형 일간지의 기사는 김원봉의 비서였다는 중국인 사마로의 말을 좀 인용했던데, 기사 작성에 참여한 이들이 사마로 만년의 회고록을 보았더라면 의용대 일부의 북상 후 김원봉이 연안에 가고 싶어 했으나 중국공산당이 사절했다는 대목도 모르지 않을 테고, 사마로의 회고록을 보지 못하고 1951년에 썼다는 자서전이나 보았다면 사마로를 통한 김원봉 연구의 자격 미달이라 해야겠다. 

 

광복 후 중국 동북에서 조직된 조선인부대들을 조선의용군이 만든 듯이 쓴 것도 역사사실과 어긋난다. 조선의용군의 지대들이 동북 각지에서 활약하고 부대건설에 이바지한 건 맞으나, 조선인 부대들은 결코 조선의용군의 독점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건을 비롯한 항일투사들이 부대조직과 지휘에서 많이 활약했고, 조직된 크고 작은 부대들도 중공의 동북민주연군, 후에는 동북야전군, 중국인민해방군에 속했으며, 1950년에 조선인부대들이 조선(북한)으로 갈 때에는 원래 조선인들을 위주로 했던 부대들을 기초로 하여 다른 부대들에 섞여 있던 조선인들 및 신병들을 보충하여 3개 사단이 만들어졌다. 때문에 그런 부대들을 모두 조선의용군이라고 말할 수 없거니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와 엮을 수는 더구나 없다. 당시 해방군의 사단급에서 활약한 지휘관 중 전우 같은 사람은 동북에서 항일했다가 소련을 고쳐 연안으로 갔기에 김원봉 및 조선의용대와 인연이 없고, 중하급 군관들은 거개 광복 후 동북 땅에서 조직된 군정학교 출신들이므로 김원봉과 조선의용대와 더구나 아무런 인연도 없다. 

 

조선인민군의 뿌리에 대해서는 1940년대부터 1950년대 중후반까지 조선에서 쟁론이 많았다가 김일성 수상이 항일유격대를 뿌리로 단언하면서 쟁론이 그쳤다. 당시 조선 정부와 당, 군에는 의열단 출신, 조선의용대 출신, 조선의용군 출신들이 꽤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당 및 군대의 뿌리로 자신이 몸을 담았던 조직을 넣은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혁명전통을 상하좌우로 넓혀서 보자고 주장했다가, 한국식으로 말하면 하나둘 숙청되었다. 

 

인제 와서 제일 웃기는 것은 김원봉의 동지도 전우도 없던 반도 남반부에서 김원봉을 우러러 높이 올리는 사람들이 있나 하면, 김원봉의 죄를 강조하기 위해 김원봉과 조선용대, 조선의용군을 과대 포장하는 사람들도 있는 현상이다. 

 

참고로 말하면, 김원봉이 조선의용대의 대장이었다 해서 의용대의 모든 것을 장악했고 의용대 출신들이 한 일들까지 그에게 끌어 붙이는 것 역사에 대한 무지나 왜곡 때문이다. 워낙 중국 관내에서 조선인들은 자그마한 조직들로 나뉘어 반일활동을 벌이다가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 첫해 말 중국 수도 난징이 함락되기 전에 조선민족혁명당, 해방동맹, 전위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이 4개 조직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으니, 각자의 대표는 김원봉, 김규광, 최창익, 유자명이었다. 이 연맹이 이듬해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는데, 연맹이 중국 국공양당이 합쳐 만든 정치부 제3청의 영도를 받았기에 의용대도 당연히 정치부의 의도 및 중국군의 수요에 따라 움직였다. 의용대 내부에 기존 조직들의 영향이 남아있었고, 후에 상당수 북상하였다. 뒷날 충칭에서 민족전선연맹의 잔존세력이 임시정부 및 한국독립당 등과 토의하여 당파통일을 이루었고 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었는데, 이미 김원봉의 통제를 벗어나서 중국 북방에서 조선의용군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사람들까지 명부에 넣은 건 지난번 정문일침에서 거든 바이다.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을 조선인민군의 뿌리로 엮으려던 사람들은 뻔하게 보이는 속내 때문에 역사자료들을 제 구미대로 요리했다. 역사는 그렇게 다루는 게 아니지만, 정치적으로 필요하니까 그런 것 같다. 

 

그와 좀 달리 다른 대형일간지의 한 유명 기자는 보천보 전투의 지휘자가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글을 썼다. 미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출신 아마추어 역사학자 유순호 씨(혹은 재야 역사학자라고 할까)의 주장을 베낀 것까지는 이해된다. 탈북자로서 북에 대해 악감이 많으니까 구미에 맞고 일정한 근거도 있어 보이는 내용을 소개하는 건 인간으로서도 기자로서도 그럴 만한 노릇이다. 그러나 “북한이 보천보전투에 의미를 두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는 단언은 기자가 남의 주장을 베끼었든지 아니면 스스로 단정했던지 기본 역사 사실에 어긋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기 활동으로 꼽히는 게 학창시절 《김일성장군의 략전 연구소조》를 무었다는

것이다. 이 략전(약전)은 1950년대 조선이 공식적으로 출판한 권위적인 도서이다. 여기에서 1937년 6월 4일에 진행된 보천보 전투는 단독적으로 다뤄지면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바, 김일성 장군이 친히 부대를 이끌어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에서 전투를 진행하였다고 썼다. 그보다 앞서 진행된 1936년 무송현 전투는 1937년의 13도구 전투, 1938년의 안도지방 전투, 1939년의 반절구 전투 등과 함께 보천보 전투 뒤에 몰밀어 시간과 지점들만 열거되었다. 

 

또한 1957년 5월에 출판된 《대중정치용어사전》(조선로동당출판사)는 “정치, 경제 용어에 중점을 두고 력사, 법률, 철학, 자연과학, 정치 시사, 문학 예술 등 각 방면에 걸쳐 비교적 빈번히 사용되는 용어 2, 144개를 수록”하였는데, 항일무장투쟁시기 전투로서는 보천보 전투가 유일하게 수록(사진)되었다. 

 

▲ 《대중정치용어사전》(조선로동당출판사, 1957년 5월 출판, 128쪽)     © 중국시민

 

조선이 1940년대부터 보천보 전투에 큰 의미를 부여한 증거들은 너무나도 많은데 필자 수중에 있는 것들만 일일이 열거해도 얇은 책자 한 권 분량은 될 것 같다. 

 

그 기자가 북에서 살때에는 혹시 수십 년 전의 책자들을 얻어 보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만, 남에서 정착한 지 오래고 기자로서 상당한 명성을 누리니까 통일부나 무슨 연구소들에 소장된 1940~ 60년대 조선 자료들을 찾아보기는 쉬울 것이다. 그런데 남의 말을 베꼈든지 자기 스스로 판단했든지 북이 1960년대 후반부터 보천보 전투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고 하니, 현대조선 역사를 좀이라도 아는 사람들이 웃지 않을 리 있겠는가? 진짜 역사학자들은 구태여 낭설들과 근거 빈약한 주장들에 일일이 대응할 가치를 느끼지 않으니까, 필자 같은 역사 애호자가 나설 수밖에 없다. 

 

그 가지는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그동안 북한은 보천보전투를 김일성의 최대 업적 가운데 하나로 내세우며 북한 주민들에게 김일성 신격화를 세뇌시켜 왔다. 유 작가의 저서가 공개되고, 보천보 전투가 김일성 부대의 참모장 왕작주가 지휘한 작전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북한 사람들에겐 적잖은 충격이 될 것 같다.” 

 

조선의 3대 수령에 대한 온갖 주장들을 자유로이 접하는 중국에서 그들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경하는 걸 보면, 기자의 예언은 빗나가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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