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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온 편지]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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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형
기사입력 2020-01-13

 

'감옥으로부터 온 편지'는 지난해 10월 18일 미 대사관저 월담 투쟁으로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김수형, 김유진, 김재영, 이상혁 학생들이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으로 보낸 편지를 소개하는 기사입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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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김수형

 

하염없이 날 바라보던

당신의 눈동자

구슬피 떨어지던

별의 눈물을 보았어요

 

온갖 서러움과

갈 곳 잃은 원망이

실타래마냥 얽히고 설켜

기어이 당신의 말문을

가로 막았나봐요

 

갈갈이 찢기우는

부모 맘도 모르고

진녹색 누더기 위에

초췌한 머리칼

낯설은 수번

 

야속하게도 서있는

유리창건너

배시시 웃기만 하는 자식

미움은 그냥 가둘 수 없는 거겠지요

 

한 평 남짓한 공간을 메운

무거운 침묵 뒤엔

너한테 하나 잘못 가르친 게 있어.

남의 집 담을 넘지 말라는 거

 

그리 속상해하던 모습이 있었는지

처음 마주한 아픔에

얼마나 가슴이 아리던지

 

내 어찌 부모 맘을 모르겠어요

내 자식 뽀얀 얼굴에 누가

쥐똥만한 생채기 하나만 내어도

온 세상 와르르 무너져 내린 듯

가장 먼저 마음으로 아파하고

피눈물 흐르는 게

부모 맘인걸

 

그런데 사실 저

참 많이도 아팠답니다

 

콧잔등이 시큰하도록

삭혀 온 울분에

내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밤낮없이 앓아온

서글픈 열병이

내 얼마나

깊이도 사무쳤는지

 

이제야 훤히

당신 앞에 꺼내 놓아요

 

반만년 맑디맑은

새아침 이슬 머금고

순백의 혼 흐드러지게 핀

꽃다운 조선 산하에

 

철조망 내리박아

두 동강난 허리엔

한서린 피가

말없이

붉게도 흘러내렸대요

 

신음할 새도 없이

그렇게

놈들의 군홧발은 꾹꾹

내 할미 할애비의

숨통을 조여댔고

 

하이얀 의복 걸친

천사같은

내 고운 형제 누이는

총들은 식인종

광기 어린 두 눈엔

한낱 잿더미일 뿐이었대요

 

분단의 찌꺼기를 먹고 자라난

잔혹한 그 괴물은

장갑차를 타고서

너덜너덜한 내 육신을

깔아 짓뭉개고

 

그 마저도 모자라

온 천지에 제국주의 오물을

실컷 싸질러놓았죠

 

그렇게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늦가을 추위 맡

단풍잎처럼 스러져 갈 때

나의 몸도 으스러져갔고

애절한 내 마음은

더는 버틸 수 없었어요

 

내 민중 목에다

칼자루를 들이밀며

돈과 패권을 부르짖는

역겨운 놈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곳

 

그 곳을 향해 달려가

네 모든 아픔을 쏟아부으라

조국의 부름에 답했고

당당한 내 양심의 명령이었어요

 

그깟 담벼락 하나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 아무리 높고

단단하다 한들

수세월을 지켜온

민중의 긍지 앞에선

한낱 파도 앞의 모래성일 뿐이에요

 

무너질 리 없던 그 벽이

산산히 조각나

찬란한 새 아침을 환히 맞이 할

모두가 평화속에 웃으며 살아가는

그 곳에서 비로소

나는 숨 쉴 수 있어요

 

행복하냔 당신의 물음에

나는 행복으로 답해요

 

이다지도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럼없는 마음

어찌 미소 짓지 않을 수 있나요

 

내 모든 기쁨이

당신의 행복되어 훨훨 날아갈

그 날을 위해

내가 더 노력하고

사랑을 아끼지 않을게요

 

 

*이 시는 김수형 학생이 면회 오신 부모님의 눈물을 보고 쓴 시입니다.

  

▲ 미 대사관저 투쟁으로 구속된 대학생들의 수번과 이름     ©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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