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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묻는다, 백성에게 묻는다" 영화 천문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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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어진 통신원
기사입력 2020-01-14

 

* 영화 천문에 대한 감상 기사입니다. (영화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 

 

▲ 영화 천문 홍보 포스터     

 

<천문 – 하늘에 묻는다>. 이 영화가 세종과 장영실이라는 두 위인에 대한 이야기라고 들었을 때는, 단순히 조선 전기 과학기술 발전의 정점을 찍었던 세종시대의 업적을 다루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가 그려낸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짙은 여운을 남긴 이유는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당당한 나라,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이 행복한 나라를 꿈꾸었던 사람과 그 길을 함께한 진정한 벗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었다.

 

굴욕적 사대관계, 전략 외교인가 자기합리화인가

 

조선과 명(明)은 아주 오랜 시간 길고도 지난한 사대관계를 유지해왔다. 지금에 와서는 조선에 있어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외교 관계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 백성들에게 이 관계로 인한 실질적 피해가 있었다면 단지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무마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조선은 500년 동안이나 중국과의 관계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여러 차례 의미 없는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저들이 원하는 정복 사업을 위하여 조선의 청년들을 파병해야 했고, 저들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백성들이 먹고살기 어려운 때에도 대량의 조공 물품을 바쳐야만 했다.

 

영화 속 조선의 대신들은 그러한 조선과 명의 관계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명나라가 화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명나라 없이는 조선도 없다는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백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제 나라 백성들을 천하다고 생각하고 얕잡아보면서 명나라 사신과 뒷돈을 주고받으며 착실하게 자신의 이익을 챙겨나갔다. 그 모습에서 제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해 미국에 머리를 조아리며 한심한 행태를 보이는 지금의 적폐 세력들을 보이는 듯했다. 우리 민족의 삶에는 관심도 없는 외세에 이상한 환상을 가지고 사대를 부르짖는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갉아먹고 민중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는 모습들이었다.

 

동시에 남의 나라에 와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명나라 사신의 모습에서는 최근 주한 미 대사 해리 해리스의 만행이 그대로 비춰 보였다. 남의 나라에 일일이 간섭하며 식민지 총독 행세를 일삼는 모습이 어찌나 닮았던지. 그 어떤 시대에도, 어느 곳에서도 외세는 결코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냉정한 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세종과 장영실, 선을 넘은 사람들

 

영화에서 세종은 명나라에 예속적인 조선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백성들이 잘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예속적인 사고방식이 백성을 괴롭게 한다는 사실을 빠르게 알게 되었다. 백성들이 잘살기 위해서는 명의 것을 버리고, 조선에 맞는 새로운 것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에서 결코 왕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가장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명나라가 없으면 조선이 망하느냐? 조선은 조선만의 언어와 시간이 있어야 한다."

"나는 명이 없어도 홀로 우뚝 서는 조선이 보고 싶다.“

 

그러나 영화 속 세종은 끊임없이 그 금기를 넘어서기 위해 시도한다. 그가 꿈꾸는 ‘홀로 우뚝 서는 조선’은 남의 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정치를 하는 조선이었다. 그 꿈을 위해 그는 관노인 장영실을 면천하고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했다. 세종이 만들어 준 터전 위에서 장영실은 조선의 하늘을 열었고, 조선의 시간을 만들었다. 훗날에는 명나라와 사대부들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선만의 언어를 만들기에 이른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이야기되는 훈민정음의 창제였다.

 

물론 세종을 지금의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 왕조 체제의 정점에 있는 기득권자로서 체제 자체를 바꾸거나 명나라와의 사대적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그러나 영화 속 그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을 앞장에 서서 넘으며 끝끝내 자주적인 나라로 가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종의 그러한 시간을 함께하게 된 장영실의 모습도 참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 그것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꽃피우게 된 장영실. 그가 세종을 만나며 함께 고난을 이겨내는 과정 속에서, 진실로 이 땅의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당당한 나라를 꿈꾸는 사람으로 성장해나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억압하는 그 무언가에 맞서 싸우고, 그를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진보하는 존재라는 것을 영화 속 장영실의 이 보여준 것이다.

 

같은 꿈을 꾸며 많은 고비를 넘어서고 이겨내는 세종과 장영실, 두 사람은 저들은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어도 참으로 동지였다.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느냐는 물음에, ‘자네와 같은 벗이 있지 않은가’라고 대답하는 그 모습에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같이 고된 길을 걸을 사람이 있었기에, 혼자가 아니라 함께 선을 넘고자 했기에 두 사람은 그 금기를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민중들이 겪은 그 숱하고 고된 순간들 속에서도 한 길 가는 벗들, 해낼 수 있다는 낙관으로 이겨내는 벗들이 있기에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묻고 있는가

 

영화의 제목이 ‘하늘(天)에 묻는다(問)’였던 것은, 단순히 천문학의 발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예로부터 백성은 하늘이고,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다. 세종이 명나라가 아닌 백성들로부터 답을 찾았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업적들을 그려낸 영화이기에, 제목을 백성에게 묻는다는 뜻의 ‘천문’이라고 한 게 아닐까.

 

그렇기에 영화를 보며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나라는 누구에게 물음을 던지고, 누구에게 답을 찾으려 하고 있는가? 최근 미국이 우리에 대한 압박과 공세를 강화하는 모습이 점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기득권자들이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고 패배주의적인 언행을 일삼는 것은 그들이 노예성에 기인해 답을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노예근성, 그것이 일제강점기 일제의 편에 섰던 민족반역자들의 사고방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 민중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어떤 강대국에도 주권을 함부로 내 줄 수 없다는 강한 신념, 강한 마음에서 답을 찾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가 아무리 거대한 존재라도, 그들이 가혹한 탄압을 가해도 끊임없이 싸우고 투쟁하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불매운동이 그러했고, 방위비 분담금 인상 반대 투쟁이 그러했고, 미 대사관저 담을 훌쩍 넘어 구속을 당한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4명의 대학생의 모습이 그러했다. 

 

영화 속에서 세종과 장영실이 탄압과 압박 속에서도 기어코 금기를 넘어서고, 자신을 기꺼이 내던지면서까지 그 신념과 꿈을 지키려고 했던 그 모든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랬듯이 미국에 당당한 목소리를 내고 우리의 자주를 기어코 지켜내고야 말리라는 우리 민중들의 피땀 섞인 시간 또한 눈물겹게 아름다운 과정들이다. 

 

우리 사회에도 아직 너무 많은 금기의 벽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누구에게 물음을 던지며 고비를 이겨내야 할 것인가는 이미 먼저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과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자주성을 지키는 싸움을 하는 이들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를 위해 험한 길을 기꺼이 가는 이들이 있다면 끝내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영화가 역사의 일면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우리가 정말 물음을 던지고 답을 구해야 할 이들은 미국도, 기득권자들도 아닌 누구보다 이 땅을 사랑하는 민중들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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