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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 빨치산의 증언] 2. 왜 그 신발을 바꿨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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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사입력 2020-06-10

<평화이음>이 월간 '민족과 통일' 6월호를 발간했다.

우리사회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소개한다. (편집자 주)

 

▲ 여성 비전향장기수 박선애 열사와 윤희보 북송 비전향 장기수 부부

 

근현대사 구술

한 여성 빨치산의 증언

 

유일한 여성 비전향장기수였던 박선애 선생의 생전 구술 내용을 정리하여 몇 차례에 걸쳐 공개한다. 박선애 선생은 1927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해방 후 여성단체 활동을 하다 전쟁 시기 빨치산이 되어 1951년 1월 체포되었다. 광주포로수용소에서 10개월을 보낸 후 11월에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65년 만기출소를 하였지만 1975년 다시 사회안전법에 따라 재수감되었다. 1979년 출소하여 통일운동과 여성운동에 전념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2010년 9월 25일 별세하였다. 

 

 

왜 그 신발을 바꿨던가! 

새 신을 나에게 주고 다 떨어진 신을 대신 신고 눈밭을 헤매다 죽음을 당했는지도 모를 보고 싶은 내 동생

 

그러다가 1951년 12월부터 1952년 3월까지 저쪽에서 총공세를 시작했어요. 노령산맥에는 3개 사단을 풀고 또 지리산에다는 4개 사단을 풀어놨어요. 그래가지고는 비행기로 석유통을 막 던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온 산이 불바다였죠. 그 지경이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나겠어요? 게다가 우리 퇴로도 다 막아버렸어요. 항상 부락하고 연결이 되어야 식량도 가져오고 했는데 그걸 탁 끊어 버린 거죠. 1미터 간격으로 군인이 하나씩 배치되어 있었어요. 

그때 열여섯 살 먹은 남동생이 참모장 연락병이었어요. 쪼그만 것들이 얼마나 용감한지 몰라요. 연락하는 데도 비호같았죠. 연락이라는 것은 보통 원활하지 않으면 안 되었거든요. 그것도 그렇고 연락이라는 것은 만약 그걸 뺏기면 전체 사단이 망하죠. 잘못해서 연락병이 잡혀서 불어버리면 큰일이 나니까요. 그 남동생은 어머니 안 계실 때 우리가 거의 키우다시피 한 아이였는데 전에 학교 다닐 때 까불고 말도 잘 안 듣고 그랬는데 거기 오니 아주 의젓해지더라고요. 노래도 잘하고 학습도 간부들하고 있을 때 나보다 더 잘하고 그랬어요. 

내가 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시월이었어요. 그때 동생이 전투 나가는 참이었는데 날 보더니 자기 신은 새것이고 내 신이 낡았으니까 “누나, 나는 전투에 나가면 또 새 신을 신을 수 있으니까 누나 신하고 바꿔요”하기에 바꿔줬어요. 그리고 먹을 것을 주더라고요. 그렇게 헤어졌는데 나는 그 신을 신지도 못하고 잡혀 버렸어요. 한 달 후인가. 

그런데 걔는 얼마나 눈 속을 헤매고 헤맸는지 죽어도 나타나지를 않는 거예요. 계속 행군을 하는 사람은 사는데 그냥 가다가 서서 배낭을 짚고 서 있는 사람은 죽는대요.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그러죠. 그렇게 가는 데는 계곡도 지나가야 하는데 물도 많았어요. 물속을 쑥 들어가면 몸이 좀 녹아요. 그러다 또 나오면 다 얼어서 퍼석 퍼석해져요. 그렇게 가다 보면 떡 서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왜 안가?”하고 치면 퍽 쓰러져 버려요. 죽은 거죠. 

나중에 포로수용소에서 다른 사람들 말을 들으니까 우리 동생이 죽었다는 거예요. 그 사단장도 죽었대요. 얘들은 저희 상부가 죽으면 젖 떨어진 애같이 돼요. 그래서 내 동생이 사단장 권총을 들고 어떤 일이 있어도 싸우다 죽겠다면서 다른 애하고 둘이서 나섰다가 죽었다는 거예요. 그때 열일곱, 열여덟인 애들은 죽는 것도 안 무서웠던 거예요. 

그래서 결국 동생은 죽었다는 거예요. 그 신도 없이 맨발 벗고 다녔을 생각을 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지금까지도 그 신을 내가 왜 바꿨던가? 그 신을 걔가 신었으면 좀 더 오래 어떻게든 더 뛰어서 버틸 수도 있었을 텐데... 걔하고 신발을 바꿀 때에야 걔가 그렇게 급박해질 줄 몰랐죠. 그런데 동생하고 바꾼 그 신을 나는 뺏겼단 말예요. 그 신을. 그걸 생각하면 속상하고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우리 동생 세 살 먹었을 때에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까 거의 우리가 키운 거나 다름없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아휴... 세상에, 내가 그 신을 왜 바꿨던가! 감방에 가서도 항상 그 생각이 났어요. 

그렇게 남동생은 죽고 나는 잡히고 여동생 순애는 산에서 잡히고 그랬어요. 나는 전투부대가 아니라 지역에 들어가서 조직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지역에 들어가서 어떤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이 그전까지 그 지방 당 책임자였는데 변절을 한 줄 까맣게 몰랐어요. 그렇게 해서 잡힌 거죠. 그러니까 얼마나 기가 막혀요. 우리는 그렇게 잡히고 산에서는 싸우다 잡히고 그랬죠. 

우리를 잡아서는 다시 역이용하려고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그때가 2월이었는데 전투가 한창이어서 온 천지가 불바다였어요. 그러니까 우리를 역이용하려고 얼마나 지랄 지랄을 하던지. 그쪽에서 아버지를 우리한테 면회를 들여보냈어요. 아버지 말씀이 그 사람들이 아버지한테 딸들하고 같이 살고 싶으면 딸들을 잘 타이르라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그쪽 사람들한테 쟤들은 이미 포기했다, 나하고 살 그런 애들이 아니라고 했대요. 그러시면서 “너희들, 아버지 생각하지 말고 너희들 일이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그러시데요. 우리 아버지께서는 거기 고향에서 유지셨어요. 그리고 우리 오빠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중에는 변절자도 있고 별사람들이 다 있었어요. 어쨌든 그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를 살려준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포로수용소로 넘어간 거예요. 거기서 대구형무소로 간 거구요.

 

성희롱 거부하면 즉석에서 총살당했던 광주 포로수용소

 

내가 처음 잡혀간 곳은 광주 포로수용소였어요. 일반 인민군은 거제도로 갔는데 우리는 광주로 간 거죠. 빨치산만 있는 곳이었어요. 포로수용소라고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광주의과대 운동장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거죠. 그 포로수용소는 헌병이 관리하는데 그 사람들이 얼마나 못됐는지 몰라요. 처음에 가 보니까 여자가 한 삼백 명 정도 잡혀 있었어요. 다 이십대고 젊었죠. 아주 고요했어요. 

천막을 몇 개 쳐놓았는데 누군가 한 명이 노래를 시작했어요. 걔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여순항쟁 때 자기 어머니, 아버지가 다 학살당했대요. 그런데 걔가 ‘여수는 항구였다’를 부르는데 그렇게 노래를 잘해요. 그 노래는 당시 중학교 교사가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인 여순항쟁 노래였어요. 그 노래를 우리도 다 따라 불렀어요. 합창을 한 거죠. 

 

“여수는 항구였다. 철썩철썩 파도치는 남쪽의 바다. 어버이의 혼이 우는 항구 도시 여수.” 

 

막 그러고 울면서 걔가 노래를 하니까 우리도 다 따라 불렀어요. 

거기 포로수용소에서는 사람들보고 모두 무릎을 딱 꿇고 쪼르르 앉으래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다들 그렇게 쪼르르 앉았죠. 그리고 번호를 붙여야 했어요. 그냥 하나, 둘, 셋 하는 게 아니라 하나둘셋 그렇게 빨리 군대식으로 하라는 거예요. 아이구, 이걸 한숨에 쫘악 하래니까 젊은 사람들은 그런대로 하는데 피난민 아줌마들은 힘들죠. 

거기 생활은 말도 못 해요. 그때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어요. 거기서 천막이 여덟 갠가 있었는데 한 천막에 칠십 명쯤 수용되어 있었어요. 나는 그때 여기서도 뭔가 해야 한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난 뭔가 해야 한다고...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유식한 것도 아니지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그런 생각에서 제일 순수한 그런 애들을 골랐어요. 열아홉 살, 스무 살 먹은 애들이 순수해요. 나이가 조금 먹으면 타산을 하니까요. 

여하튼 그래서 내가 뭘 했는가 하면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을 게 아니라 우리가 아는 영화 얘기를 한다든가 역사 이야기를 한다거나 해서 하나가 나서서 이야기하면 그걸 듣고 그러자고 했어요. 그러니까 영화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먹고 싶은 음식 요리하는 법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정읍 아주머니라고 있었는데 그이가 음식을 하도 잘한다고 그러기에 그러면 음식 이야기를 좀 하라고 했더니, 닭찜은 뭘 어떻게 하고 또 뭔 찜은 뭘 어떻게 하고 그런 걸 이야기해줬는데 그러면 먹고 싶은 참에 잘됐다고 다들 열심히 들었죠. 

그리고 나는 역사 이야기를 했어요. 역사를 아느냐, 사육신이 어떻게 했느냐, 그런 이야기를 했죠. 그리고 젊은 사람들을 모아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양심을 속여서는 안 된다, 자기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다음에 만날 때 떳떳하게 만나자, 너하고 나하고 다음에 만날 때 웃고 만나자, 서로 고개를 돌리게 하면 안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그러니까 애들이 언니, 언니 하면서 나를 잘 따랐어요. 

그렇게 되니까 또 여기를 파괴할 생각에 정보를 수집하려고 사람들을 하나씩 빼가는 거예요. 우리가 무슨 말을 했나 그런 걸 알려고 말예요. 그런데 거기서 이용당한 사람은 돌아와서 눈을 똑바로 못 쳐다보고 고개를 숙이고 돌아와요. 그렇지만 거기서 끝까지 이기고 온 애들은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언니, 내가 가니까 이런 것 저런 것 물어보면서 언니가 뭐 어쨌냐고 물어보던데”하고 이야기를 다 해주죠. 

그래서 나는 사람이 진실한지 아닌지 그 본심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는 걸 알았어요. 어려울 때 보니까 말 잘하고 유명한 간부보다도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한 그 사람이, 다른 때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 사람이 바로 진짜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 유명한 사람, 잘났고 말 잘하는 사람이 어디 가서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녜요. 

그리고 포로수용소에서는 예쁜 여자애들을 헌병이 데리고 나가기도 했어요. 그래가지고는 성적으로 요구한다든가 그러는 거죠. 그런데 한번은 예쁘장한 여자애가 하나 불려 나갔는데 조금 있으니까 걔가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인민 공화국 만세!” 

 

그러니까 총소리가 빵빵 나더니 쏘아 죽여 버렸어요. 제 말 안 듣는다고. 그런 일이 많았어요. 그때 여자애들이 다 처녀애들이거든요. 대부분이 젊고 삼십대가 없었어요. 삼십대도 늙은이로 알았죠. 봉자 엄니라고 서른두 살짜리 여자가 있었는데 다들 늙은이라고들 그랬으니까요. 

여하튼 애들이 예쁘게 생겼으면 뽑아 갔어요. 그래가지고 거기에 넘어간 애들은 어떻게 우물우물하고 그러지 않으면 그렇게 쏘아 죽이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총소리가 밖에서 빵빵 나고 그 지랄을 했어요. 그놈들이 그렇게 못됐어요. 

거기 불려 나갔다 온 애가 그러는데 여자들보고 아래옷을 벗으라고 한대요. 그리고 아래를 이렇게 하고 딱 서보라고 한대요. 그런데 그걸 안 하겠다고 거부하는 애들은 총 쏴 죽이고 때리거나 형을 많이 만들어 버리고 자기들 말 잘 들어준 애는 그냥 두고 그랬어요. 그것들은 개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에요. 그렇게 똑같은 짓을 반복해서 사람들을 볶아 먹고 했어요. 

그리고 남자들은 포로수용소에서 말도 못 하게 고통스러웠어요. 남자들 탄압이라는 건 말도 못 해요. 남자들은 밤이면 매 맞고 말도 못해요. 나도 매는 무진장 맞았어요. 그놈들한테. 그래서 허리도 못 쓰게 되어 버렸죠. 내가 특별히 뭐를 해서가 아니라 걔들한테 역사 이야기해주고 그랬다고 그러는 거였죠. 하도 지독하게 맞아서 병신이 다 되어 가지고 형무소로 넘어왔어요. 그런데 남자들은 참 많이도 맞았어요. 하루에 시체가 몇 드럼통씩 나갔어요. 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거기서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도 못 해요. 그 잘 생겼던 신사, 멋쟁이들이 사람 같지도 않은 몰골로 변했죠. 그리고 또 그것들이 우리한테 군복을 입혔어요. 피더블유(PW)라는 포로라고 써놓은 그걸 입혔어요. 그러니 사람 몰골이 더 말이 아니었죠. 

여하튼 그러다가 나도 군법재판을 받았는데 사형을 받았어요. 그런데 군법은 그 자리에서 십 오 분 내에 즉결재판을 했어요. 그러니까 사형이니까 그 자리에서 총을 철컥 땅... 그 지랄이에요. 진짜로 쏜 것은 아니고 그냥 그렇게 공포를 줬어요. 그러다 조금 있다가 15년형을 내리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대구형무소로 갔어요.

 

바지에 그냥 설사를 하는 남자들과 함께 대구형무소로

 

그렇게 형을 받고 가는데 남자들은 설사를 했어요. 그때 세균전을 했는데 대장염에 걸려서 설사를 쫘악 쫘악 해요. 그래서 남자들 바지가 다 똥이에요. 여자들은 똥을 그래도 걸어가서 변소에 가서 눴는데 남자들은 걸어가지도 못하고 앉아서 눴어요. 같이 가는데 똥을 싼 남자들하고 한 차를 탔어요. 여자는 다섯 명인가 그랬어요. 그렇게 같이 타고 가니까 그놈들이 냄새난다고 DDT라고 하얀 거 있죠? 그걸 우리한테 다 뿌려댔어요. 그러니까 온통 허연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사람 같지도 않았죠. 짐승 같았죠. 

대구역에 가니까 미국년들 모자에 그 뭐 닭벼슬 같은 것을 꽂고 사진을 찍고 막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이건 반란군이고 폭동군이라고요. 

여하튼 대구형무소에 도착하니까 그래도 좋은 게 있었어요. 잡역 일을 하던 이계덕이라는 사람이 바가지에다가 자기네 직원들이 먹는 된장국하고 밥을 갖다 주는 거예요. 광주 포로수용소에서는 소금국만 줬거든요. 너무 써서 못 먹을 정도였죠. 밥은 알랑미(안남미. 베트남쌀)이고 도저히 못 먹어요. 매를 하도 많이 맞아서 열은 펄펄 나는데 그런 걸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거의 굶다시피 하다가 대구형무소에 가서 그걸 먹으니, 아! 세상에 이런 맛있는 된장국이 없어요. 처음에 그렇게 해주니까 그래도 포로수용소보다는 대구형무소가 나았어요. 콩도 들어있고 보리도 주니까 포로수용소보다는 훨씬 괜찮았죠.

 

진짜 선생님 ‘하나’ 할머니

 

여하튼 거기 간 사람이 칠십 명이었는데 내가 그랬죠. 

 

“다른 것은 몰라도 자기가 어떻게 변절했는가?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항상 자기비판 다 해라.”

 

그래서 각 방에서 그런 것을 해가지고 우리 방에 오면 당신 왜 그렇게 되었는가, 어떤 데서 그렇게 되었는가 말하고 또 저 사람은 어떤 데서 어쨌더라, 그런 이야기를 다 하라고 했어요. 

 

그때 하나 할머니라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장애인같이 눈도 이상하게 뜨고 그랬는데 포로수용소에서 번호를 하면 하나만 하고 셋 하라 그러면 “몰라요” 그랬어요. 그래서 다들 제일 앞에 ‘하나’ 하는 자리에 앉혔죠. 그리고 번호 해라 하면 “하나!” 그것만 했어요. 

그런데 그 하나 할머니가 교도소에 와서 비판을 시작하니까 다들 놀랬죠.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줄 아는가 그랬더니 자기비판도 하고 상호 비판도 하는데 대단하더라니까요. 자기가 척 나서서 먼저 하는데 자기 남편이 광산노동자래요. 화순 탄광 노동자였는데 거기 간부였대요. 그리고 산에 가서 연대장도 했는데 전사했다나 봐요. 그래서 그 할머니는 아이 하나는 떼놓고 하나는 업고 왔어요. 한 애는 누가 데리고 갔대요. 그이 말로는 자기가 탄광에 있을 때 이승만 반대 시위하느라고 철길에 드러눕기도 하고 그랬대요. 

그런데 그이가 뭐라고 하냐면 “내가 여기까지 잡혀 온 것은 내가 내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잘못해서 잡혀왔으니 이게 날 비판하는 거다” 그러더니 그 다음에는 소대장 아이를 비판하는 거예요. 걔는 간부였던 아버지가 학살당하고 엄마도 학살당해서 빨치산에서 소대장 하던 괜찮은 얘였어요. 그 아이가 포로수용소에서 우리들한테 하나, 둘 번호 시키고 뭘 그런 걸 했거든요. 처음에는 그놈들이 우리가 번호를 잘못하면 그 소대장을 때렸어요. 그래서 소대장이 이제 우리한테 번호를 시켰죠. 그런데 우리가 번호를 하지 않으니까 그놈들이 서로 마주 보고 뺨을 때리게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걔가 서로 뺨 때리기를 시켰다는 거예요. “세상에, 네가 그럴 수가 있느냐? 네가 누구 딸이냐?” 하면서 그 하나 할머니가 꼬치꼬치 따지는데 놀랬어요. 

 

“네 아버지가 뭣 때문에 죽었는데 네가 서로 동지 간에 때리게 만들어? 네가 그 사람들한테 당하면 우리가 가만있을까봐 그랬냐?” 

 

그러니까 걔가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었어요. 하여간 그 하나 할머니는 나중에 나갔어요. 피난민이고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아들도 찾아야 했으니까. 그 후에는 그이를 못 만났죠. 지금 어디 가서 어떻게 사는지... 눈도 이상하게 뜨고 다니고 팔도 일부러 이렇게 하고 다녀서 병신 같다 했는데 알고 보니까 멀쩡해요. 그러니까 바로 그게 선생님이다 싶더라니까요. 올바르게 사람들도 볼 줄 알고, 문제도 제대로 볼 줄 알고 그랬어요. 그런데 오히려 똑똑한 사람은 자기비판 안 해요. 자기 좋은 점, 자기 잘했다는 것만 말하려고 하는 걸 많이 봤어요. 

그렇게 대구형무소에서 살다가 동지들을 만났죠. 거긴 빨치산만 있는 게 아니라 저쪽으로 갔다가 나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옥환이도 그렇고 서분이도 그렇고... 이제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랬는데 사람이 그렇게 재판도 받고 하면서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이제 조용하게 있게 되었으니 공부도 좀 해야겠다 하는데 그사이에 모조리 잊어버린 거예요. 어쩜, 그렇게 깡그리 잊어버렸는지. 사람이 무슨 충격을 받으면 그렇게 다 잊어버리는가 봐요.

 

빨치산 시절 끊겼던 생리가 다시 시작

 

그리고 재미있는 건 빨치산 하는 동안에는 한 번도 월경이 안 나왔어요. 충격을 받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다 형무소 들어오니까 비로소 월경이 나오더군요. 삼 년 동안 생리가 한 번도 안 나오더니. 다른 여자들도 거의 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 이듬해 53년도에 생리가 나오더라고요. 

여하튼 충격을 받고 나니까 왜 그렇게 기억력이 떨어지든지 그 사람들 이름도 흐릿하게 잊어버려지고 뭘 기억해내려면 오래 걸리곤 했어요. 

포로수용소에서 몽둥이로 얼마나 많이 맞았던지 허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허리를 밟아주고 하면 일어나고 그랬었어요. 그런데 그중 하나가 간호원이었어요. 나를 아주 좋아했는데 그 여자가 감찰이 되었어요. 나중에 걔들이 첩자 역할을 하기도 했죠. 걔는 일본에서 나온 애인데 자기가 정말 몰라 가지고 동지들을 그렇게 했다면서 내 정보도 추적하고 그랬다고 나중에 털어놓더군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가 다 알아보고 다니고 그랬다는 거죠. 그렇게 자기비판 하면서 울대요. 그러면서 미안하다면서 나한테 아주 잘해줬어요. 

그때 걔는 간호원 출신이라고 형무소에서 간병부 일을 시켰어요. 그 당시 프로도가스(?)인가 하는 영양제 주사가 있었는데 다른 수용자한테 나갈 건데 그걸 걔가 나한테 하루에 한 대씩 놔줬어요. 그러면 전신이 확 풀리고 아주 시원해지는데 한 달인가 맞으니까 내가 언제 허리가 아팠던가 싶게 다 나았어요. 그래서 허리는 지금까지도 괜찮아요. 그 덕분에 내가 살아 나온 거죠. 

또 형무소에서 사람들도 만나고 부딪치고 하다가 거기서 일 년 육 개월 있다가 공주로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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