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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 빨치산의 증언] 3. 지독하게 추운 겨울, 속옷 바람으로 징벌 받게 했던 지독한 윤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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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사입력 2020-07-14

평화이음이 월간 '민족과 통일' 7월호를 발간했다. 

우리사회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여성 비전향장기수 박선애 열사와 윤희보 북송 비전향 장기수 부부     

 

근현대사 구술

한 여성 빨치산의 증언

 

유일한 여성 비전향장기수였던 박선애 선생의 생전 구술 내용을 정리하여 몇 차례에 걸쳐 공개한다. 박선애 선생은 1927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해방 후 여성단체 활동을 하다 전쟁 시기 빨치산이 되어 1951년 1월 체포되었다. 광주포로수용소에서 10개월을 보낸 후 11월에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65년 만기출소를 하였지만 1975년 다시 사회안전법에 따라 재수감되었다. 1979년 출소하여 통일운동과 여성운동에 전념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2010년 9월 25일 별세하였다. 

 

6.25때 수용자들을 다 태워 죽인 공주 형무소

 

공주 형무소로 이감시킬 때는 우리를 다 싣고 갔어요. 공주형무소는 새집이었어요. 그런데 가보니까 화단에 수정(징벌 받을 때 차는 수갑의 일종)이 굴러다니고 있었어요. 그 전에 6.25 터졌을 때 거기에 불을 질러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다 태워 죽였다고 해요. 하여간 공주형무소에는 잡범은 없고 우리만 있었어요. 우리는 조치원에서 내려서 형무소 버스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갔어요. 여자들 다섯이 있고 간수가 하나 있는데 우리가 가니까 간수 두 명이 더 왔어요. 그래서 우리가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자하고 그냥 ‘담당’이라고 불렀어요, 허허. 

 

거기서는 문도 좀 열어놓고 다니고 왔다 갔다 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공부도 한다고 했는데 책은 서양사, 국사, 동양사 같은 역사책밖에 없었어요. 다른 책을 주지를 않았어요. 우리는 면회 올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 집에는 아버지하고 올케가 있었는데 올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니 우리들 같은 사람은 자체적으로 사는 거죠.

 

박정숙, 김선분 선생님을 만난 서대문 형무소 

 

그러다가 55년도 되니까 서대문 형무소로 싹 모이라 해서 이송되어 갔어요. 우리가 다 가니까 공주 형무소 간수가 한 명 남게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제일 좋은 간수 보고 갑시다, 갑시다 해서 서대문 형무소로 데리고 갔죠. 전국에서 거기로 다 모인 거예요. 제1사는 옛날 건물이니까 거의 쓰지도 않고 그랬어요. 

 

처음에 오니까 누가 누군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공장 나간다고 여자들 수놓고 뜨개질하고 그런 일을 했는데 거기서 언니들도 만나고 했어요. 그렇게 5년 동안 서대문에 있다가 60년도 1월에 다 분산시켰어요. 그것도 전향공작이죠. 그래서 군산, 전주, 광주, 안동 뭐 이렇게 싹 보냈어요. 그렇게 다 헤어져서 나는 광주로 갔어요.

 

처형장으로 데리고 간다는 소리를 듣고도 잠을 잤던 광주형무소

 

광주로 가니까 서울보다 광주가 좋더라고요. 서대문 있을 때 걔들이 전향공작 하느라 이쪽에 붙였다 뗐다 막 하니까 그걸 못 견뎌서 정신이상 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 와중에 전향하고 나간 사람도 있었는데 60년에 다시 분산시킨 거예요. 그래서 광주로 가니까, 세상에 독방은 독방인데 이불을 다섯 채를 줘요. 서대문에서는 하나도 제대로 못 썼는데. 담요도 여덟 개나 줘요. 어이구, 이에 웬일인가 했죠. 그리고 다 새것만 줬어요. 집은 옛날 집인데 말예요. 

 

그때 광주로 간 사람이 여덟인가 열인가 그랬어요. 그런데 거기로 가니까 잡역이 아주 좋더라고요. 그 사람은 박 씨였는데 우리한테 우선적으로 독방 먼저 주고 뭐든 우리를 도와줬어요. 문도 열어주고 그랬어요. 그 사람은 빨치산이었는데 아주 순진한 사람이었어요. 그냥 뭐든지 자기희생하고 자기는 안 먹어도 동지를 주고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람이 더러 있어요. 그렇다고 그런 사람이 이론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지만 아주 순수한 사람이죠. 우리 보고 문도 열어주고 배구도 하라고 그러고 간수들하고도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우리가 뭘 좀 해주면 간수도 뭘 막 사다 주고 그러면서 살았어요. 간수들이 일본 잡지도 갖다 주고 같이 보면서 좋은 관계로 살았어요. 

 

그러다가 4.19 나고 5.16 나니까 비전향한 우리를 다 잡아 죽인다고 어디로 데려간다고 그러더라고요. 어느 날 저녁에 있으니까 “짐 싸!, 짐 싸!” 그래요. 왜 그러냐니까 우리를 처형시킨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다들 “야, 이제 우리는 죽으러 간다” 했는데 한참 있다 보니까 사람들이 다 자버리는 거였어요. 허허, 죽으러 갈 판인데... 그러니까 이젠 죽는다 하고 더 이상은 생각을 안 하니까 잠이 온 거죠.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야 잠이 안 올 터인데 이제 죽는다니까 똑바로 죽자, 그러자, 하고 다들 악수하고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사람들이 다 자는 거예요. 

 

그러고 있으니까 동이 텄어요. 뭐가 또 바뀌어서 우리를 죽이지 말라고 했대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박정희가 우리를 처형시키자고 그랬는데 뭐가 어떻게 바뀌었대요. 

 

그 다음에는 우리를 딴 사동으로 전방 시켰어요. 거길 갔더니 애들이 양갈보를 가득 몰아놨어요. 박정희가 정리한다고 깡패까지 마구 다 잡아 가지고 그럴 때였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하고 조금 과거가 있다는 사람들 다 잡아 가둬서 형무소가 미어졌어요. 그래서 복도까지 사람들로 북적거렸어요. 

 

그러고 있는데 어느 날 사람들을 몰아넣고 문을 탁탁 다 닫더라고요. 그러더니 목사가 하나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서 원래 잡범으로 형을 살고 있던 사람 말이 목사가 온 걸 보면 사형집행이 있나 보다고 그래요. 그 옆이 바로 사형장이었어요. 바로 여사 옆에 사형장이 있었던 거예요. 

 

조금 있으니까 목사가 가고 누가 가고 하면서 와글거렸어요. 그리고 또 조금 있으니까 온 천지가 다 울리게 “인민공화국 만세!” 하는 소리가 났어요. 또 조금 있다가 두 번째로 “인민공화국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 하면서 어떤 남자가 아주 크게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그런 다음 찰카닥 소리가 나더니 “으악!” 하는 게 들렸어요. 교수형 당한 거예요. 사형시킨 거죠. 아마 저쪽에서 나온 공작원이나 그런 사람이었겠죠. 

 

그 사람이 사형당하니까 우리 모두 그 소리를 듣고 엉엉 울었어요. 그런데 살인범으로 온 여자 하나도 막 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간수가 “너는 왜 우냐?” 그러니까 그 여자는 공범이 사형 집행당한 장면을 생각하고 운다고 그래요. 

 

그렇게 우리가 막 울고 있는데 옆에 양갈보로 들어 온 얘가 열여덟 살인가 열아홉 살 먹었다는데 걔가 “오빠!”하고 “아이구!”하고 막 소리를 쳐요. 그러다가 얘가 까무러쳤어요. 그리고 나서 의무과장 오고 의사가 오고 야단이 났어요. 알고 보니까 전쟁 때 자기 가족이 저쪽으로 다 가버렸는데 그 사형당한 남자 목소리가 자기 오빠 목소리라는 거예요. 그렇게 기절해버리니까 애를 밖으로 데려가 버렸어요. 까무러치고 해서 귀찮으니까 그냥 데리고 가버린 거죠. 

 

우리는 또 저녁밥도 못 먹었어요. 그 사람 사형 당한 소리를 들었으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죠. 그리고 복도에 그런 여자들을 다 데려다 놓으니 여름에 생리를 하니까 그 냄새가 복도에 진동을 해요. 생리대도 잘 안 하고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도 괜찮으니까 우리 방에 들여다 놓으라고 해도 우리한테 물든다고 안 들여다 놓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그냥 편안하게 있었죠. 그 사람들은 그냥 복도에 있고 말예요. 

 

마약사범도 양색시도 가기 싫어한 무덤 같은 대전형무소

 

그러다 박정희 때 전향 안 한 사람들을 전부 대전으로 다 몰았어요. 대전형무소는 마약사범이나 양색시들도 가기 싫어한 지독한 형무소였어요. 

 

대전으로 가는데 남자들도 많이 갔어요. 그런데 세상에 창문을 다 닫아 버렸어요. 도망간다고 말예요. 8월 달인데 얼마나 더워요. 그리고 사람들을 죄다 묶어 놓았는데도 문을 닫아 놓고 어찌나 웅성웅성했는지. 그리고 대전에 갔을 그때는 새로 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어요. 우리가 갈 때 열다섯 명인가 열여섯 명인가 갔어요. 그런데 가보니까 딴 데서도 오고 해서 합치니까 열여덟 명이었어요. 남자들은 굉장히 많았죠. 그래서 남자들이 싸워서 문을 열었어요. 찜통 같으니까. 똑똑한 남자도 있고 별사람이 다 있어요. 

 

그렇게 해서 대전으로 가니까 세상에 완전히 무덤에 온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이감을 가면 아는 사람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포로수용소에 있었으니까 어느 형무소를 가든 아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러면 아는 사람을 만나면 눈으로 인사하고 막 그러거든요. 그리고 누가 왔나 얼굴이라도 보려고 하고 그러는데 대전으로 가니까 조용한 게 아무도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어요. 

 

여사에 턱 들어갔는데 아무 소리도 안 나요. 다들 방에 들어가 있을 시간인데 말예요. 이건 무덤이다 싶더군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걔들이 훈련을 시켜서 우리들이 있는 방을 지나갈 때는 서서 가지 말고 앉아서 가라고 했대요, 세상에. 

 

그런다고 그래 앉아서 걸어가요? 우리는 조금 배짱이 있거든요. 그래서 “야야, 왜 그렇게 걸어가냐?” 그랬어요. 그러니까 말하지 말라고 고개를 흔드는 거예요. 언제 들어왔냐고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요. 그놈들이 기를 팍 죽여 놓은 거죠. 그래서 그 사람들은 앉으라면 앉고 서 있으라면 서 있어요. 안 그러면 매 맞고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사람들이 어디 가서 자꾸 당하게 되면 기가 죽어버려요. 그래도 우리는 그것들한테 얻어맞거나 말거나 막 떠들고 그랬어요. 

 

그리고 밥이라도 나눠 주면서 청소 나오는 사람은 그래도 교도소 직원들이 인정해준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 중에서 서울에 있던 사람이 있었어요. 9.28 때 우리하고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 거기로 왔던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밥을 주기에 “아이고, 언니!”하고 불렀는데도 뒤에 간수가 따라 오는 바람에 대답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왜 저럴까 했어요. 그 사람들 무기 받고 그런 사람들이에요. 

 

김진언이라는 제주도 노인네도 거기 있었어요. 그 아주머니는 4.3 때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대요. 그때 막내 남동생이 열여덟 살 먹었는데 산에서 돌아왔대요. 밥을 달라는데 해놓은 밥도 없고 밥을 새로 할 수도 없었대요. 불을 피울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보니까 쌀이 조금 있기에 좁쌀하고 그걸 줬대요. 그리고 조금 있다가 동생이 돌아갔는데 얼마 있으니까 집집마다 다 나오래요. 나가보니까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있는데 동생을 잡아 놨더래요. 그것들이 동생보고 어디서 쌀을 먹었느냐? 누가 줬느냐? 하더래요. 그래도 말을 안 하니까 배를 갈랐더래요. 그 사람들 있는 데서, 세상에. 그 개새끼들이. 그러니까 쌀이 나왔더래요. 자기가 준 것이.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그래도 그 아줌마가 그때는 뭐라고 하겠어요? 슬픈 것도 없고 겁나는 것도 없고 자기 정신이 아니더래요. 감방에 있을 때 울면서 그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결국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서 산으로 갔대요. 그러다가 49년에 체포당해서 서대문에서 무기선고를 받았어요. 그러다 전쟁이 났고 인민군대가 서대문형무소를 해방시켰을 때 그 사람이 저쪽으로 갔대요. 이북으로 가서 거기 있다가 그 아주머니는 다시 제주도를 해방시켜야겠다 하고 다시 나왔대요. 그러다 체포된 거예요. 

 

그래서 4년을 선고받았대요. 그때 나하고 같이 만난 거죠. 4년만 살고 나간다고 생각했다는 거죠. 전향을 하면 4년만 살고 나간다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그랬죠. 대구형무소에서도 봤거든요. 6.25때 들어온 어떤 여자가 그놈들 말만 믿고 전향서 썼는데도 원심대로 형을 다 살았단 말예요. 그랬는데 이 아주머니는 그놈들 말만 믿고 전향서 썼는데 만기가 되어서 나가려니까 안 된다고 먼저 원심대로 무기를 살라고 그러더래요. 그러다 4.19 때 감형되어 가지고 내가 대전에 가니까 거기 있더란 말예요. 

 

그 아주머니는 일류 해녀였대요. 잘 생겼고 체격도 좋았어요. 몸도 요기는 쏙 들어가고 나오고 해서 우리가 미인대회 나가야겠다고 했죠. 하여간 그 아주머니는 몰래 할 때는 뭐든 많이 주고 갔어요. 그런데 말을 안 해요. 저 사람들하고 말을 좀 해야 할 텐데 말을 할 기회가 있어야죠. 아, 그럴 때 말을 얼른 하고 왔으면 좋겠는데 말을 안 하는 거예요. 거기가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리고 거기 온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전향서를 안 써서 그곳으로 왔다고 하지만 변절해서 우리를 혼란시키려고 들어온 이도 있었어요. 바로 이 씨가 그랬어요. 미친 게 아녜요. 자기가 미친 척한 거지. 처음엔 말을 술술 하대요.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들어왔다고, 억울하게 들어왔다고. 

 

그사람 말이 6.25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왔대요. 58년도에 나와 가지고 불기만 하면 모든 걸 보장해주겠다고 해서 싹 불었대요. 그래가지고 안기부 놈하고 산거예요. 한 일 년 간 동거를 했대요. 그런데 어느 날 그놈이 와 가지고 송치한다고 그러더래요. 다 써먹었거든요. 가치가 없으면 송치하든지 아니면 없애 버리는 게 걔들 방법이에요. 송치한다고 하니까, 이건 기가 차거든요. 펄펄 뛰면서 이럴 수가 있냐고 하니까 그놈이 통일이 되면 다 넘기려고 죄다 써놓았다고 협박을 하면서 그동안 쌓아 놓은 서류를 이만큼 보여 주더래요. “네가 아무리 잘 났다고 해도 이 서류 다 넘길 거야!” 그러더래요. 그러니까 펄펄 뛰고 개새끼야, 십새끼야, 하고 그랬대요. 그래도 형무소로 넘겼대요. 

 

그래서 재판을 받았는데 너무 억울해서 묵비권을 행사한 거예요. 일절 말을 안 한 거죠. 너무 억울하니까. 그러니까 이년 악질이라고 사형을 준거예요. 걔가 나보다 대엿 살 더 먹었어요. 자기 딸이 그때 중학교 다녔을까? 47년에 난 딸이래요. 자기 시어머니가 키웠대요. 자식도 있으니까 자기를 버리고 살려고 안기부 놈하고 동거를 한 거죠. 그런데 그놈들이 도로 보내니까 지랄이지. 묵비권을 쓰니까 사형을 받았다가 친정에서 변호사 사고 그래서 무기가 되었대요. 

 

하여간에 전주에 있으면서 전향서를 절대로 안 쓰겠다고 한 거예요. 열 받아서 말예요. 그런데 자기가 어느 날 보니까 전향서 쓴 사람이 있는데 전향서를 안 쓴 자기한테 먹을 것도 주고 쪽지도 보내주고 그러는데 전향서만 썼다 뿐, 속은 하나도 안 변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옛날에 전향서 쓰고도 이렇게 되었는데 왜 나를 탄압하느냐고 소장 면회를 신청했대요. 그렇게 소장 면회를 해서 누구는 마음은 하나도 안 바꾸고 전향서만 썼는데 그렇게 해주고 자기는 옛날에 전향서 썼어도 왜 이렇게 대접하느냐고 따졌대요. 그 바람에 간수들을 싹 모아놓고 남자들이 와서 검방(방 검사)을 했대요. 그래서 자기한테 잘해 준 그 사람도 징벌 받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자기를 악질이라고 우리가 있는 감방으로 들여보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하고 한 방에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미친 행세를 하는 거예요. 공연히 인민군 만세를 부르고 또 대한민국 만세를 하고 그 지랄을 했어요. 그런데 그걸 우리 앞에 묶어 놓으니 우리는 밥도 못 먹고 그게 보통 고통스러운 게 아니에요.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앞에 묶어 놓았는데 밥을 먹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내가 소리쳤죠. 데려가라고. 뭐 때문에 우리 앞에서 이런 걸 하냐고. 당장 데려가라고, 그러니까 풀어 놨는데 그년이 우리한테 무슨 욕을 하고 그래요. 우리가 한 이야기를 다 고발한대나. 그래서 내가 “야, 이 년아!” 하고 담요를 탁 뒤집어씌웠어요. 그리고 목을 잡았어요. “그래, 해라. 너 하나 죽여도 나 괜찮아. 너 같은 년. 다 말해라.” 다른 언니들도 막 때리면서 “말해! 해!” 그러니까 그년이 가만있대요. 그다음 그 이튿날 간다고 지랄하더니 갔어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멀쩡해져서 전도꾼 여자하고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예수 믿는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것도 겪었어요. 

 

변절자하고 싸우는 것도 보통 힘드는 게 아니에요. 조금 해보면 누가 변절자인지 보면 알아요. 변절자 아니더라도 얼마간 대화를 해보면 그 사람이 무언가 자기 말을 솔직히 하지 못하고 그런 걸 알 수 있어요. 그러면 어딘가 무엇이 있겠다 싶죠. 그런 사람하고는 아무리 수십 년 살아도 친해질 수가 없어요. 그런 사람하고는 단둘이 있으면 할 말이 없어요. 아까 걔는 집이 잘 살아요. 걔는 나중에 완전히 기독교 광신자가 되었어요. 어머니를 간호할 사람도 없고 하니까 나와서 간호하는데 옷도 다 떨어진 것 입고 돈이 생기면 무조건 하나님한테 바쳐야 한다고 그러고. 자기 형제도 걔를 보고 다 광신자라 그러더라고. 내가 두 번째 거기 가니까는 멀쩡해서 다니더라고요. 씩 웃던데요 뭘.

 

지독하게 추운 겨울, 수정차고 속옷 바람으로 징벌 받게 했던 지독한 윤 소장

 

그런 상황에서 63년인가 64년도에 지독하게 추운 날이었어요. 인천 앞바다가 얼었다고 할 정도로 굉장히 추운 해였어요. 그해 1월 5일인가 나를 영화감상을 시켜준다고 대전 시내에 데리고 가데요. 전향서 쓴 황경자 하고 같이 갔는데 간수들도 같이 갔죠. 시내에 있는 아주 근사한 극장이었어요. 무슨 시집가는 날인가 뭐 그런 영화였어요. 가난한 시골 여자가 부자 대학생한테 시집갔는데 천대 안 받고 진실을 알아줘서 잘 살았다는 내용이었어요. 

 

괜찮은 영화다 하고 왔는데 그 이튿날 교무과에서 나를 오라고 하더니 영화감상문을 쓰라는 거예요. “감상문 쓰는 것은 좋아하지만 내가 제대로 비판하고 쓰면 당신네들이 그걸 갖고 문제를 만들 건데 내가 왜 써요? 안 써요.” 그랬죠. 그랬더니 계속 쓰라면서 지랄하더라고요. 당신네 감상문을 내가 왜 쓰냐고, 황경자한테 쓰라고 해요, 전향한 여자한테 쓰게 하라고. 

 

그런데 소장 놈이 그때 우리 포로수용소에서 전향서 처음 쓰라고 한 놈이었는데 윤병희라고 아주 독살스럽고 못된 놈이었어요. 그놈이 소장이에요. 글쎄. 아, 그러니까 나보고 소장실에 오라고 해서 갔어요. 웬만하면 쓰라고 그러데요. 그래서 당신네들이 문화사업을 한답시고 즉석에서 뭘 하려고 하면 그건 문화사업이 아니다. 그걸 즉석에서 하려고 한다는 게 군사문화요. 문화사업은 수백 년, 수천 년 흐른 뒤에 효과가 나타나는 거고 만약에 그 영화가 훌륭하다면 내가 아, 정말 그 작품이 좋다 이런 걸 느낄 수 있는 것이지. 그런데 즉석에서 이런 걸 쓰겠냐고 이 감상문은 절대로 안 쓰겠다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요런 건방진 년이라고 지랄하고 옷을 싹 벗겨버리데요. 그 추운데. 그래서 벗기려면 벗기라고 그랬더니, 우리 전향서 안 쓴 사람이 모두 열두 명인데, 다 독방 가 있는데 그 사람들 전체를 옷을 다 벗겼어요. 팬티하고 홑바지 하나만 남기고 내복을 다 벗긴 거죠. 그리고 저쪽 앞에서 딴 사람들하고 마주치면 안 되니까 당장 앞에 퍼런 커튼을 치고 다른 사람들이 못 보게 가렸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만 거기다 딱 갖다 놓았어요. 그런데 너무 추우니까 도대체 그것들도 우리 쪽에 와서 붙어 서 있지도 못해요. 뭐라고 잔소리도 할 수 없는 거죠. 하도 추워서 자기들이 우리 쪽으로 오지도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쪽하고 저쪽하고 통방(다른 방에 연락하는 것)을 했어요. 방이 열두 갠데, 내 목소리는 저쪽까지 간대요. 딴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옆으로 퍼져버리는데 내가 이야기를 하면 목소리가 똥글똥글 해 가지고 이쪽에서 저쪽까지 다 간대요. 그런다고 나보고 통방을 하래요. 그래서 내가 12방에 저쪽에 있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그랬죠. 

 

그때 대구 여자가 하나 있었어요. 그 여자 아버지가 부자였어요. 그래서 먹을 것도 사 오고 돈도 많이 오고 그랬어요. 그 사람이 물건을 사 가지고 물건을 다 청구한 거예요. 그러면 그 여자가 감방에서 다 나눠 주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나눠 주냐면 내가 주면 그다음에 옆에서 가지고 옆방을 주고 다 나눠 먹는 거예요. 이야기도 다 하고 말예요. 너무 추우니까 거기 붙어 서 있을 수가 없어서 걔들이 감시도 못 했으니까요. 

 

얼마나 추운지 덜덜덜 떨려서 사람들이 다 동상 걸리고 그랬어요. 나는 막 이렇게 뛰고 저렇게 뛰어서 땀을 흘렸어요. 딴 언니는 얼굴이 이만치 얼고 뺨이 얼기도 해서 의무과에서 약을 발라줬죠.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안 얼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가 하도 독살 맞아서 얼음도 도망간다고 그러데요. 그리고 내 피부는 자꾸 문지르고 그러면 동상이 안 걸리는 그런 피부에요. 그리고 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거꾸로도 뛰고 땀을 내서 안 언 거예요. 

 

그런데 열이틀이 지났는데도 얘들이 그냥 그대로 뒀어요. 참 고민스럽대요. 나 혼자라면 견디겠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나 하나 때문에 당하니까 참 망설여지는 거예요. 내가 가서 감상문을 쓰고 이 사람들을 풀어 줘야겠다는 생각도 나기에 다 물어봤어요. 

 

“내가 가서 쓸까?” 

 

그러니까 다들 일없다고 쓰지 말라고 그러대요. 

 

그랬는데 보름 만에 누가 왔느냐면 법무부에서 무슨 과장인가가 순시를 왔어요. 그 과장이 그걸 보더니 왜 이러느냐고 했죠. 그러니까 그 윤병희라는 소장 놈이 다 불순분자들이고 뭣이 어떻고 지랄하더라고요. 그래서 나하고 아까 말한 그 대구 여자하고 따졌죠. 이럴 수가 있느냐고. 

 

그 대구 여자는 기가 당당해요. 어디라도 당당해요. 자기 아버지는 군수예요. 그리고 오빠는 사단장이고, 4.3 때 제주도에 가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자기 집은 다 안 그런데 혼자만 그런 거죠. 자기 집에서도 기 안 죽고 자라나서 소장한테도 당당하게 그런 걸 잘 따지고 그랬어요. 

 

그런데 난 그런 걔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당당하지 못했구나 싶대요. 쟤는 어쩜 저렇게 당당한가? 우선 나는 자랄 때 당당하게 자라지 못했어요. 우리 집은 항상 경계 대상이고 또 우리 아버지께서 엄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당당하게 따지지를 못했어요. 커 가지고 내가 의식적으로 당당해야겠다 한 거죠. 

 

그런데 걔가 그러더라고요.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둘 수가 있는가? 우리가 뭐 잘못한 게 있는가? 아니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안 썼다고 가둬놓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그러니까 아무 말 않고 가더니 이제 오라고 하더니 수정(손에 채우는 징벌기구)을 풀어줬어요. 그래가지고 딴 방으로 갔어요. 딴 사람들은 다 이런 데가 얼고 해서 약 바르고 그랬어요. 

 

그렇게 그놈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지독하게 못되게 굴고 그랬어요. 그 소장 놈이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육 과장할 때도 우리한테 전향서 쓰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 부장이 어떻게 못 되고 악독한지 그년이... 어떤 이는 대들었다가 형을 다 마치고도 십 년을 더 살았어요. 

 

남자들은 전향서 때문에 죽은 사람도 많아요. 굉장히 많아요. 원칙적으로 따진 사람도 많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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