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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 빨치산의 증언] 4. 인텔리와 부자는 교도소에서도 대우가 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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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사입력 2020-08-08

평화이음이 월간 '민족과 통일' 8월호를 발간했다. 

우리사회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여성 비전향장기수 박선애 열사와 윤희보 북송 비전향 장기수 부부     

 

근현대사 구술

한 여성 빨치산의 증언

 

유일한 여성 비전향장기수였던 박선애 선생의 생전 구술 내용을 정리하여 몇 차례에 걸쳐 공개한다. 박선애 선생은 1927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해방 후 여성단체 활동을 하다 전쟁 시기 빨치산이 되어 1951년 1월 체포되었다. 광주포로수용소에서 10개월을 보낸 후 11월에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65년 만기출소를 하였지만 1975년 다시 사회안전법에 따라 재수감되었다. 1979년 출소하여 통일운동과 여성운동에 전념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2010년 9월 25일 별세하였다. 

 

인텔리와 부자는 교도소에서도 대우가 다르고 예수 믿으면 거의 전향자로 인정받아

 

교도소를 가면 인텔리에 돈도 있으면 대우가 달라요. 교도소에서도 그 대구 여자 같은 사람은 당당하게 따지고 뭔 소리를 해니냐고 했어요. 그러니까 걔는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더니 한번은 변소에 가면서 하는 말이 “야, 나는 전향서가 아니라 완전히 변절이다” 그러더군요. 그러니까 전향서를 쓴 사람들은 그걸 쓰고도 다시 자기 길을 갈 수 있지만 자기는 완전히 변절이라는 것이었어요. 자기는 본래 부자 가정에서 살고 친일파 아버지에 친미파 오빠를 가졌는데 자기가 제 길을 안 가고 했으니까 이제 도로 돌아가니까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다고 말예요. 

 

그런데 내가 기독교를 더 싫어한 게 왜냐하면 걔한테 공작한 게 전도사여서 그랬어요. 그 전도사 남자가 날마다 한 번씩 방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문을 꼭 닫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단둘이. 그렇게 해 가지고 하나씩 둘씩 전향을 시켰어요. 그러다 보니 나하고 셋이 남았어요. 나는 그 전도사가 문 앞에 왔길래 “비켜요!” 그랬어요. 가라고. 그러니까 저런 억센 여자 처음 봤다고 하대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면 전도사인데 이북에서 온 사람이었어요. 와서 말을 붙이고 오랫동안 별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며칠을 그래가지고 공작을 했어요. 그리고 올 때 뭘 사 가지고 와서 먹으면서 이야기도 하고 자꾸 그러더라고요. 기독교인이 신성한 종교를 위해서라기보다 이념적인 정부에 붙어 가지고 그런다는 것 때문에 나는 도저히 기독교인들을 순수하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죠. 기독교인이라고 모두 다 그런 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인간이라는 것이 다 다르다는 걸 아니까요. 중요한 건 본성이죠. 

 

대전교도소는 기독교만 믿으면 전향을 한 걸로 인정해줬어요. “나는 예수 믿어요” 하면 인정해줬어요. 전향서를 쓸 필요도 없어요.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빠지고 했대요. 우리같이 “전향서 쓰시오!” 그런 것이 아니래요. 기독교 믿는 사람 손들어라 할 때 손들면 거기 가서 떨어져서 그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되어 있었어요. 다른 곳은 간수라도 인간과 인간이라 가까워질 수도 있는 것인데 대전에는 도저히 그럴 수 없게 장벽을 단단하게 해놓았어요. 

 

어쨌든 독방에 갇혀 있을 때도 한 번도 지루한 적은 없었어요. 간수들이 1시간마다 왔다 갔다 하니까 그걸 기준으로 시간표를 짜서 역사 공부한 것을 머릿속에 다시 기억해보고 혼자서 노래도 부르고 하면서 시간을 빽빽이 채우면서 살았어요. 안 그랬으면 견디기 어려웠을 거예요.

 

병든 몸으로 다시 사회에 발을 디디며

 

그러다 1963년도부터 혈압이 높아지기 시작했어요. 관절도 아프고. 나는 사실 머리 아픈 것은 전혀 몰랐어요.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책은 아무리 많이 읽어도 골이 안 아팠는데 그때는 조금만 읽어도 골이 아프더라고요. 심장도 막 뛰고... 그리고 굉장히 아프기도 했는데 이렇게 저녁에 혼자 앉아 있으면 앞에 있는 창문이 착 깨져서 내 가슴에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나곤 했어요. 그리고 어떤 때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어요. 이상한 여자가 머리를 풀고 쉬익~하는 그런 꿈이었죠. 그런 걸 보고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잠을 깨곤 했어요. 그런 증상이 나타나면서 잠도 못 자고 골까지 아프고 굉장히 위험할 정도로 많이 아팠어요. 혈압도 높고 몸이 이렇게 부었으니 사람 꼴이 형편없었죠. 

 

그렇게 해서 1965년에 나왔어요. 원래 15년에서 조금 감형되었어요. 왜냐하면 4.19 혁명 때 북쪽에서 나온 사람은 무조건 감형 안 주고 남쪽 사람은 감형을 해줬거든요. 

 

나오긴 나왔지만 갈 데도 없었어요. 우리 아버지께서는 나 나오기 한 해 전에 돌아가셨어요. 고향에는 갈 데도 없고 갈 데라고는 하나도 없었어요. 시골에는 나에 대해 빤히 다 알아서 그것들이 더 지랄하고 그런단 말예요. 

 

그리고 여동생은 복막염으로 4.19 혁명 때 형 집행정지로 나왔다가 한약 먹고 배가 싹 빠졌는데 그걸 보고 형사들이 자꾸 다시 감옥에 데려가려고 하니까 한 달 만에 서울로 와버렸어요. 그런데 아는 사람도 없고 서울도 처음이고 하니까 남의집살이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그 동생하고 합칠 형편도 못되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어렵게 살고 있던 큰 언니 집으로 갔죠. 남의집살이하던 동생이 많이 도와주곤 했어요.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는 권유에 결혼

 

그러다 누가 결혼을 하라고 그래요. 그렇게 다 죽게 생겼는데 무슨 결혼을 하느냐? 그리고 결혼을 하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결혼을 하느냐고 안 하겠다고 했는데 중신하는 분이 혼자보다는 둘이 여러모로 낫다고 그러대요. 그리고 또 상대가 우리 동지니까 혼자보다는 낫고 건강도 안 좋고 하니까 결혼을 하라고 하셨어요. 그 중신해주신 선생님께서 내 주치의나 마찬가지였어요. 내가 나와서 쓰러지고 교통사고도 나고 했을 때 날 도와준 분이죠.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갈 데도 없고 해서 결혼을 한 거예요. 시어머니도 계시고 시아버지도 계신 그런 집안에 시집을 간 거예요. 시아버지께서는 어디 피해 계시다가 그때서야 오셨는데 내가 몸도 성하지 않고 다 죽어가는 몰골이니까 나를 보고 시어머니께서는 남편한테 ‘어디서 고르고 고르다 티를 골랐구나’ 하셨대요. 우리 남편이 63년에 감옥에서 나왔거든요. 결혼을 하라니까 영 안 하더래요. 이렇다고 안 하고 저렇다고 안 하고 그러다가 데리고 온 여자를 보니까 다 죽게 생긴 데다 인물도 형편없으니까 고르고 고르다 티를 골랐다고 한 거죠. 난 그때 많이 아팠어요.

 

완벽한 시어머니, 맨날 아프고 일도 못하는 며느리

 

몸이 정상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우리 시어머니께서는 만사 능통이셨어요. 바느질 잘하고 일 잘하고 글도 잘하고 그러셨거든요. 우리 시어머님 연세가 그때 일흔 여섯이셨어요. 같이 모시고 사는 동안에 우여곡절도 많았죠. 시어머니께서 보시니까 내가 맨날 아프다 그러고 일도 못하고 연탄 갈 줄도 모르고 하니까 얼마나 답답하셨겠어요? 

 

그리고 또 우리 어머님 성격은 아주 깐깐한 데다 못하는 게 없으셨어요. 하루에 깨끼옷(여름용 한복의 일종)을 일곱 벌 해내시고 그 전에 명주를 들었다 하면 오전에 시작해서 점심밥 하기 전까지 한 필을 끊을(다 짤) 정도로 그렇게 잘하셨대요. 그리고 그 바쁜 데도 책을 다 보셨대요. 삼국지도 다 읽고 사씨남정기, 뭐 안 읽은 책이 없는 그런 양반이었어요. 

 

그런데 날 보니까 형편없거든요. 내가 나와서 옷이 어디 있어요? 몸이 성해요? 내 동생도 결혼을 했는데 그 남편도 저쪽에 갔다 온 사람이고 돈도 없었어요. 그런데 내 동생은 나하고 달라서 바느질도 잘하고 아주 얌전해요. 덜렁덜렁 거리지도 않고, 그래서 내 옷을 하나 해놓았다고 옷을 주고 또 딴 옷도 사놨다가 옷을 주고 그랬어요. 그것도 동생이 다 한 거죠. 그러니까 시어머님께서는 내가 멀쩡하니 새 옷을 입고 다니니까 혼자 딴 주머니를 차는구나 한 거예요. 그런데 사실 돈이 뭐 있어요? 그때 집도 다 망해가지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노인네가 아들 하나 북으로 가고 딸 넷도 북에 있으니까 마음은 온통 그쪽에 다 가 있어요. 그 보고 싶은 아들, 그리고 효녀 딸들 늘 그 말뿐이었죠. 여기서 이대 다니다가 서울사대 다니다가 하나는 경기고녀(경기여고) 다니다가 그러다 갔대요. 그런데 어머니, 어머니 했던 그 딸들은 하나도 없고 여기 있는 아들은 감옥에 있으니까 아들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어머니께서 무척 고생하셨죠. 난 그 생각만 하면 그 노인네가 불쌍하고 그래서 그 노인네를 시어머니라기보다도 우리 어머니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노인네가 남편이 어쩌다 나더러 나오라 그래서 나갔다가 남편이 준 차비를 안 쓰고 시어머니 드리려고 과자라도 하나 사가지고 들어오면 그걸 탁 던져 버려요. 

 

“너희들은 가서 실컷 좋은 것 먹고 겨우 요런 것이나 사가지고 왔냐?”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니 참 기가 차서 죽겠어요. 그리고 내가 새 옷을 입으면 그걸 내 동생이 해다 준 줄도 모르고 자기 아들이 장가가더니 마음이 변했다는 거예요. 얼마나 솔직하고 거짓말도 못 하고 속일 줄도 모르는 그 아들이 어머니 속이고 나한테 빠져서 그런다고 말예요.

 

시어머니의 닫힌 마음도 열리고

 

그래서 어느 날 내가 싸움을 걸었어요. 아무도 없을 때. 말도 조용조용할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말했어요. 

 

“어머니, 나하고 말 좀 하십시다!” 

 

그러니까 저게 왜 이러나 하고 “뭐, 해봐라!”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어머니하고 나하고는 수십 년간 따로따로 살아왔습니다. 법률적으로 어머니하고 자식이지 서로 따로 살았지 않습니까. 나는 나대로 사십 년 가까이 살았고 어머니도 어머니 세상이 있는데 서로 좋은 것을 맞춰 살아야지, 나쁜 것을 자꾸 말하면 영원히 원수가 됩니다. 어머니도 나도 좋은 점을 살려가야 할 것 아닙니까. 어머니 사랑 내 사랑 줘가면서 이렇게 해야 어머니와 자식 간이 되지 어머니가 자꾸 이렇게 나 나쁜 것만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소리를 막 질렀어요. 그러니까 동네 사람이 웅성웅성하고 그래요. 그래도 나는 싸워서라도 해결해야지 안 되겠다고 끝까지 할 말을 다 했어요. 

 

“어머니, 생각해보세요. 나는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다 압니다. 어머니를 내가 얼마나 많이 생각하는데, 어머니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합쳐야 되는 것이지 여기서 어머니와 내가 영원히 헤어져야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우리 시어머니가 속이 트인 노인네라 “그 말이 맞다. 네 말이 맞다. 그래, 그렇다. 네가 속이 트였다” 그러시면서 손을 턱 잡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 지금부터 어머니는 나를 어머니 딸이라고 생각하세요. 만약에 어머니 딸도 나왔더라면 나 같은 신세가 되었을 겁니다. 난 병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 병든 줄도 모르시니 앞으로는 나를 몸이 성한 여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랬어요. 

 

시어머니께서는 딱 부러진 성격이셨어요. 그렇게 해서 어머님과 가까워졌어요. 그래서 음식도 말예요, 내가 생전 뭐 해봤어요? 그때부터는 뭐 하나를 하더라도 국 하나 끓이면 가지고 가서 “어머니, 다 됐습니까? 맛있습니까?”하고 자꾸 물어보는 거예요. 무슨 나물 하나 무치려면 “어머니, 깨소금 요만큼 넣을까요?” 그렇게 묻고, 그래서 내가 한 음식을 놓고 누가 너무 짜다 그러면 “음식은 좀 짭짤해야 한다.”하시고, 누가 또 너무 싱겁다 그러면 “음식이 너무 짜면 안 된다.” 그렇게 제 편을 들어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맨날 실없는 소리도 자꾸 하는 거예요. 누구네는 어쩐대요. 또 누구는 어쩐대요 하면서 그렇게 해가지고 어머니와 가까워졌어요. 그 뒤로는 노인네하고 다툴 일 없이 잘 지냈어요. 나중에 우리 동생이 이렇게 맨날 몰래 내 옷을 해준 것을 아시고는 시어머님께서도 놀라셨어요. 형제가 따로 살림을 하면서 이렇게 해주는 게 어렵다면서 우리 동생 같은 좋은 사람 없다고 말예요. 그러면서 우리 동생도 알아주고, 착한 동생이라고... 만일 내가 그때 어머니한테 싸움을 걸지 않고 가만있었으면 맨날 볶아 먹고 그랬겠죠. 

 

그리고 또 다들 내가 애도 못 낳을 줄 알았어요. 다들 상상도 못 했는데 내가 애를 낳으니까 시어머니께서도 좋아하셨죠. 애도 예뻐하고 그렇게 해서 사이가 더 좋아지기도 했어요. 그런 분위기에서 시집 식구하고 살다가 시아버지께서 어디 피해계시다가 오셔서 시아버님도 함께 모시고 살았죠. 그러다 우리 애가 세 살 먹었을 때 시어머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시아버님은 그 전 해에 돌아가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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