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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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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구 주권연구소 연구원
기사입력 2020-08-14

평화이음이 월간 '민족과 통일' 8월호를 발간했다. 

우리사회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

 

서울시가 2019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은 1만7천여 명인데 이 중 74.2%가 월 소득 200만원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잘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후손들이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이야기이다.

 

떵떵거리는 친일파

 

가장 유명한 친일파로는 박정희가 있다. 박정희가 얼마나 떵떵거리며 살다 죽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듯하다. 박정희 다음으로 유명한 친일파로는 조선일보 방씨 일가가 있다. 박정희는 1970년대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이 ‘밤의 대통령’이라며 부러워할 정도였다. 2003년에는 한국 100대 부자에 방 씨 일가만 3명이 오르기도 했다. 방상훈 현재 조선일보 사장이 당시 재산 1930억 원으로 24위,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사장이 910억 원으로 65위,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당시 800억 원으로 75위를 차지했다.

 

또 다른 유명 친일파로는 얼마 전에 죽은 ‘독립군 때려잡던 간도특설대’ 백선엽이 있다. 백선엽은 강남역 앞 지상·지하 합쳐 21층의 시가 2천억 원 빌딩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를 장남 명의로 차명 소유했다가 장남을 상대로 반환 소송을 하는 웃기지도 않은 일을 벌이기도 했다. 그 외에 장남을 제외한 자녀들에게 이태원에 있는 시가 50억 원의 주택을 물려주었다.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은 어떨까? 이완용은 일제강점기에 국유지를 팔아 군산 등에 땅을 사들여 투기했다. 그렇게 이완용이 가지고 있는 부동산은 2234만㎡로 자그마치 여의도 면적의 7.7 배에 달했다. 정부는 2007년 이완용의 땅 1만 928㎡을 환수했는데, 이완용이 보유했다는 부동산 2234만㎡의 0.05%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이완용은 광복 전에 땅을 매각했는데, 그 금액이 보수적으로 잡아도 현 시가로 600억 원대에 달한다고 한다. 1992년엔 이완용의 후손이 서울 북아현동에 위치한 30억 원어치의 땅을 자신들의 땅이라며 국가에 반환소송을 걸어 승소했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승소 즉시 땅을 팔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렸다.

 

다 다루자면 끝이 없지만 마지막으로 이해승이라는 비교적 덜 알려진 친일파를 보자. 이해승은 1910년 후작 작위를 받아 조선인으로선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이해승은 1911년엔 일본으로부터 은사금 16만8천원을 받기도 했다. 땅은 1122만㎡로 여의도 면적의 약 4배를 보유했다. 이해승은 한국전쟁 중 납북돼 행방불명됐다고 알려져 있다. 이해승의 아들은 광복 전에 사망하였고 이해승의 손자인 이우영이 한국 전쟁 이후 할아버지의 재산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우영은 1957년 이해승의 법정 상속인으로 인정받았고 1957년부터 1998년까지 소송을 통해 이해승의 재산을 하나씩 되찾아갔다. 이우영이 소송을 통해 되찾아간 땅은 890만㎡으로 이해승이 보유하던 부동산 중 약 79%를 가져갔다. 정부는 뒤늦게 친일파 이해승에 대한 토지 환수 소송을 진행했으나 법원은 정부가 반환을 요구한 토지 중 단 1필지만을 환수하라고 판결했다.(필지: 경계면을 기준으로 땅을 세는 단위) 이우영은 이해승의 재산으로 서울 홍은동에 그랜드힐튼 서울 호텔을 만들었다. 

 

대우도 못 받고 심지어 탄압까지...

 

친일파들이 친일로 번 재산을 되찾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때 독립운동가들은 힘들게 살아왔다. 

 

유명한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를 집필하고 1923년 의열단 선언을 작성하는 등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이다. 당시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자치론 같은 타협론을 내걸며 변절할 때에도 신채호 선생은 이들을 규탄하며 반일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일제로부터 광복을 이뤘으나 신채호 선생의 후손들은 힘들게 살아야 했다. 신채호 선생의 아들 신수범 씨는 신채호 선생이 이승만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위협을 받다 넝마주이로 생활하는 등 떠돌이 생활을 하다 이승만 하야 이후에야 취직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신채호 선생의 후손을 탄압하기까지 했다.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씨는 2018년에 한 인터뷰에서 “박정희에게 많이 당했어요. 단재 선생의 「조선혁명선언」 있잖아요. 유신독재 반대하는 운동권 지하조직의 교과서가 됐다면서요. 단재 선생은 죽고 없으니 타겟을 (신채호 선생의) 아들로 잡았죠. 그러니 우리가 빨갱이 새끼로 쫓겨서 얼마나 다녔는지…”라고 증언했다. 심지어 가족들이 신채호 선생의 묘소에 참배를 할 때마다 정보기관에서 감시했다고 한다. 

 

신채호 선생의 일가는 신채호 선생의 묘를 국립묘지로 이장하자는 정부의 제안에 “거기엔 친일파 다 모여 있는데 왜 단재 선생을 함께 모실 수 있느냐”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는 아직 충북 청주시에 위치하고 있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유관순 열사의 후손들도 어렵게 살긴 마찬가지다. 올해 3월 1일 광복회에 따르면 유관순 열사의 후손인 70대 여성은 청소 일을 하며 월급 80만원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광복회는 이 여성이 “선대에 누가 될까 봐 처지와 신상을 밝히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유관순 열사의 조카손녀인 54세 유해인 씨는 국회 측이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회 의원회관 2층 매점에 특별 채용하여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유해인 씨는 “경제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는데,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고 그동안의 사정을 밝혔다. 

 

독립운동가 후손에게서 이런 사연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 선생은 1만 평에 달하는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광복군 창설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손자인 이재윤 씨는 기초생활수급비와 국가보훈처 지원금을 합해 99만원으로 쪽방촌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재윤 씨는 3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팔과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어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독립운동가 중엔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도 있다. 김문로 선생은 북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다 고문을 받기도 한 독립운동가다. 김문로 선생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59세에 별세했다. 김문로 선생의 아들 김시진 씨는 임대주택에 살며 폐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다 뇌졸중으로 쓰려져 3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김문로 선생은 독립운동을 증명할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지 못했다. 

 

서울시가 2019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은 1만7천여 명인데 이 중 74.2%가 월 소득 200만원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잘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후손들이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친일파의 후손은 일제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는 바람에 떳떳하게 재판까지 걸어가며 재산을 찾아가고, 반면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변변치 않은 지원금을 받아가며 탄압까지 받아가며 살아 왔다. 심지어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나라가 진정 일제에서 광복한 나라라면 친일파들은 패가망신해야 하고 독립운동 유공자들은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 광복 75년, 우리나라는 진정 광복을 이룬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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