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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읽기] 7. 미국이 좋아하는 러시아 대통령, 옐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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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선 통신원
기사입력 2020-11-21

러시아 벌판, 광활한 대륙, 우리는 러시아를 부를 때 ‘대륙’이나 ‘벌판’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는다. 러시아의 총면적은 1,707만 5,400km², 남북의 길이가 2,500~4,000km이고 동서가 9,000km에 달하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구를 여덟 조각으로 나눈 빈대떡이라고 생각했을 때 한 조각이 러시아가 차지하는 몫이다. 그래서 러시아 땅으로만 지구를 거의 한 바퀴를 돌고 러시아를 횡단하면 열 한 개의 시간대를 경험할 수 있다. 

 

러시아라고 하면 또 어떠한 것들이 생각날까?  

 

모스크바, 마트료쉬카, 소련, 톨스토이, 볼쇼이 발레, 시베리아 벌판 등 갖가지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우린 아직 러시아에 대해 잘 모른다. 러시아에 대해 얘기를 하면 소련을 기억하시는 분들로부터 “러시아? 거기 소련 아니야? 빨갱이 나라.”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 2000년대 들어와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시베리아 가스를 끌어오는 사업을 추진하면서도, 우리에게는 러시아가 가깝고도 ‘먼 나라’인 것이 사실이다. 이에 러시아라는 숲을 다 보여드릴 수 없지만 적어도 러시아를 정확히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 8편에 걸쳐 [러시아 읽기]를 연재한다.


 

[러시아 읽기] 7. 미국이 좋아하는 러시아 대통령, 옐친

 

▲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사진출처-인터넷]  

 

옐친은 러시아 제1대, 2대 대통령이자 제1대 총리를 역임한 사람이었다. 1989년 3월 옐친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하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모스크바 선거구 의원으로 선출되어 소련 최고회의에 의석을 얻었다. 그리고 1990년 5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하 ‘러시아 공화국’)의 최고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러시아, 소련에서 독립하다

 

고르바초프가 초대 소련 대통령이 된 해인 1990년 6월 12일은 사실상 러시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공표한 날이다. 그날 러시아연방 인민대표대회 총회는 '러시아연방 국가주권 선언'을 채택했다. 러시아는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과 아제르바이잔에 이어 소련을 구성했던 15개 공화국 중에서 당시 다섯 번째로 주권선언을 채택한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연방 인민대표회의 대의원으로, 러시아 초대 국가두마(하원) 의장과 안보위원회 서기 등을 지냈던 이반 리프킨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는 분명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감수하고 사실상 만장일치로 선언문을 채택했다. 그러나 선언문 중 5항은 별도로 투표에 부쳤다. 5항은 러시아연방 헌법이 소련 헌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명시한 것으로, 나를 포함해 많은 대의원이 반대표를 던졌지만 절반도 안 되었다. 당시 대표 대회는 하루 기한으로 열린 것이었지만 한 달 내내 지속했다.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보리스 옐친은 아예 공산당 탈당까지 선언했다. 우리 모두 (분당과 탈당에 대해서는) 생각들이 달랐으나 주권선언에 대해서는 한마음이었다.” 

 

공산주의는 끝났다?

 

옐친은 1990년 7월 소련공산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1년 뒤, 1991년 6월 12일 옐친은 투표에서 57%의 지지를 받아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당선된 옐친은 “공산주의는 이제 끝났다. 공산주의자들, 정직한 공산주의자들은 이제 공산주의의 체제가 붕괴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이를 역전시킬 방안은 없음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며 정치적 다원주의와 서방식 시장경제체제라는 선명한 기치를 내걸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저지되면서 소련 중앙정부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옐친은 소련 정부의 공백을 이용해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지지 기반이었던 소련공산당과 고르바초프를 압박해 정국을 원하는 대로 장악해나갔다. 그해 11월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지위를 이용해 공산당 형성을 금지하는 법령을 선포했다.

1991년 12월 초순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투표했다. 그리고 옐친과 우크라이나의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대통령, 벨라루스의 지도자 스타니슬라프 슈슈케비치 3명의 지도자가 소련의 해산과 자신들이 독립 국가 연합(CIS)을 만들자고 조약까지 체결한다. 당시 옐친은 소련 해체의 주요 목적을 공산주의자들을 해산시키고 고르바초프를 실각하는 것에 두었다. 또한 그해 소련 존속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대다수 국민이 소련을 유지하기로 결정했지만 옐친은 국민의 뜻에 반하는 행보를 보였다.

 

미국식 제도를 러시아 경제에 도입하다

 

소련의 해체 후 옐친은 러시아의 경제 제도를 구조조정 하는 목적으로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했다. 서방의 경제학자들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과 미국 재무부 같은 서방의 기구들에 조언을 구했다. 특히 1980년대 후반 미국과 국제금융자본이 미국식 시장경제체제를 개발도상국 발전모델로 삼자고 합의한 워싱턴 합의에 주목했다(워싱턴 합의는 사유재산권 보호, 정부규제 축소, 국영산업 민영화, 외국자본 제한 철폐, 무역 자유화와 시장 개방, 자본시장 자유화, 관세 인하와 과세 영역 확대, 정부 예산 삭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러시아에서도 워싱턴 합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이들 중 한 명이 옐친의 대리인이자 시장경제체제로 기울어진 러시아 경제학자 예고르 가이다르였다.

 

1992년 1월 가이다르는 러시아에 워싱턴 합의 내용을 소개했고 옐친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옐친은 해외 무역, 가격과 통화의 자유화를 명령했다.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해 거시 경제 안정화 정책을 펼쳤다. 옐친의 안정화 정책 아래 이자율은 돈을 죄이고 신용을 제한하며 극단적으로 상승했다. 균형을 맞춘다는 명목으로 세금을 크게 인상하고 산업과 건설로 정부의 보조금을 삭감했으며 국가의 복지 지출을 대거 깎았다. 결국 1992년 초부터 러시아 GDP는 추락하고 소련 시절 국가의 지원으로 유지되던 수많은 국영기업, 공장, 콜호즈(집단농장), 연구소는 예산이 대대적으로 삭감되면서 몰락했다. 그리고 소련 시대에 이뤄진 예금은 초인플레이션과 예금동결로 휴짓조각이 되어 버렸다.

 

러시아보다 먼저 워싱턴 합의를 받아들였던 타 동유럽 국가도 러시아와 상황이 같았다. 가격자유화로 인한 임금, 자산 손실이 엄청났다. 하지만 옐친 정부는 동유럽의 사례를 무시한 채 가격자유화를 시행했다. 그렇게 러시아는 물가가 수십 배 이상 폭등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더불어 앞서 언급한 결과대로 기본적인 경제 주체들이 사라지고 예금이 휴짓조각으로 변했다. 대다수 국민은 임금체불과 무상으로 제공되던 교육, 의료, 출산휴가, 노동조합 등의 사회복지 예산 삭감까지 겹쳐 빈곤과 실업의 늪에 빠졌다. 오직 소수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만 모든 부를 누리는 구조가 생겨났다. 1992년 2월에 러시아 부통령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마저 가이다르와 옐친의 경제 정책을 “경제적 집단 학살”이라며 비판했다.

 

가격자유화 이후 인플레이션은 245%에 달하였으며 1992년 여름부터 1994년 겨울까지 월평균 20%의 인플레이션이 기록되었다. 1992년 한 해 동안만 해도 인플레이션이 2,510%에 달하였으며 1991년부터 1994년까지 GDP는 매년 –12%에서 –19%까지 하락했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옐친

 

1992년 내내 옐친은 정부, 정부의 정책과 정부의 은행 및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고회의와 인민대표회의와 갈등을 빚었다. 최고회의와 인민대표회의의 많은 성원이 러시아를 최악 상황으로 만든 옐친의 정책을 반대했고 옐친이 제안한 가이다르의 총리 임명안을 기각했다.

 

옐친은 행정명령을 통해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에 1993년 초부터 최고회의 성원들은 부통령 루츠코이와 손잡아 옐친을 탄핵하고 새로운 행정부를 구성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탄핵의 위기에 처한 옐친 정부는 1993년 4월 25일 옐친 대통령에 대한 신임과 대선, 총선의 조기 선거에 대한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시행했다. 신임은 어느 정도 얻은 듯했지만 조기 선거는 과반이 넘지 않아 부결되고 말았다. 국민투표에서조차 모호하게 결론이 나버리자 대통령과 최고회의는 어떠한 해결책도 찾지 못한 채 갈등을 빚어갔다. 

 

1993년 9월 21일 옐친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법령상으로 대통령이 최고회의와 인민대표회의를 해산할 수 있게 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자신의 결정을 공표한다. 당시 현행헌법이었던 러시아 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러시아 대통령은 어떠한 국가기관도 해산시킬 수 없었다. 또한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해산시킬 경우 대통령은 면직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틀 뒤 러시아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최고회의 해산조치가 헌법에 위반되고 현행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해임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최고회의는 당시 의장이었던 루슬란 하스불라토프의 주도 아래 9월 21일 밤 긴급회의를 열어 옐친을 대통령에서 파면하고 루츠코이 부통령을 대통령 대행으로 임명했다. 사실상 옐친을 대통령에서 탄핵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수만 명의 국민이 자발적으로 나와 최고회의 성원들을 지키기 위해 시위대를 꾸렸다. 당시 러시아는 부패가 만연하고 폭력 범죄가 폭등하고 의료 서비스업들은 무너지고 있었다. 식량과 연료가 부족해 기대 수명이 감소하는 등 국민이 살아갈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에 분노를 느낀 사람들이 최고회의 성원들을 지키러 나온 것이다. 

 

이에 옐친은 병력을 동원해 의사당을 포위하는 한편 의사당을 향하는 수도, 전기 공급을 중단했다. 이때 시위대와 충돌해 시위대 내에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0월 3일 밤 옐친은 행정명령 1400호를 발령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0월 4일 모스크바 시내에 모스크바 외곽에 주둔한 모스크바 군구 타만스카야 사단 등을 동원해 전차들을 배치했다. 

 

러시아군은 10월 4일 전차를 이용해 의사당을 향해 발포했다. 의사당이 불에 타기 시작했다. 이에 루츠코이 대통령 대행은 라디오로 공군에게 크렘린 폭격을 호소하면서까지 군의 진압에 저항하려 했지만 이미 군부는 옐친을 지지하기로 한 상황이라 어떠한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군이 의사당 내부로 진입했고 최고회의 성원들은 저항을 계속할 경우 대규모 희생자가 나올 것으로 판단해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옐친은 최고회의를 지지한 언론들을 폐간하고 공산당 및 우익계열 단체의 활동을 금지했다. 헌법재판소장은 해임되었고 최고회의를 지지한 지방 회의(지방 소비에트)도 해산되었다.

 

부정부패 올리가르히의 아버지, 옐친

 

옐친은 1993년 12월 입법부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회로, 즉 오늘날 러시아 상원인 연방회의(Совет Федерации)와 하원인 국가두마(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дума)로 재편했다. 옐친 정부는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채택했고 러시아를 이원집정부제 국가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옐친에 반대해 최고회의 성원들과 함께 싸웠던 러시아 국민의 분노는 더 커졌다. 새로운 헌법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확장한 옐친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국민은 다른 방법을 고안해냈다. 바로 의회를 친옐친파 정당이 차지할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2월 입법부 선거에서 옐친파 정당은 고작 15.5%의 득표를 얻어 패배했다(러시아 자유민주당이 23%로 제1당이 되었고 공산당-농민당 연합도 22%를 차지했다).

 

1995년 12월 의회에서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22%를 득표하며 제1당이 되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옐친은 꼼수를 부리기 시작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옐친은 ‘배당을 위한 융자’라는 합의를 이용했다. 이 합의는 자신에게 선거 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올리가르히(러시아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특권 계층. 대체로 거대 재벌로 성장한 소련공산당 관료 출신이나 그들의 지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 자산 통제권을 나눠 주는 범죄적 약속이었다. 이에 당시 옐친의 민영화 정책의 최대 수혜자였던 올리가르히는 옐친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 민영 TV 방송에서 공산당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소련을 암울하게 그린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집중적으로 방영했다. 이는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후보가 시골 지역들과 작은 마을들에서 강한 조직을 꾸리고 소련에 대한 향수로 많은 이들에게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부족해 옐친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온 IMF로부터 러시아 정부 이름으로 100억 달러의 대부금을 빌리기도 했다. 그렇게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은 초반 지지율 6%에서 결선투표 진출은 물론 주가노프를 53.8%대 40.3%로 14%P 정도 앞서며 승리했다.

 

미국 언론들은 옐친의 ‘배당을 위한 융자’ 합의를 '시장개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러시아 국민은 이 합의를 ‘국민을 기만한 범죄행위'로 보았다. 오히려 합의로 인해 러시아의 올리가르히의 영향력이 정치로까지 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을 보도하며 러시아의 한 저널리스트는 옐친을 올리가르히의 아버지라고 비평했다.

 

미국에 조언을 구한 옐친

 

▲ 옐친과 클린턴 대통령 [사진출처-인터넷]  

 

옐친은 대외적으로 미국과 손을 자주 맞잡았다. 1993년 1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정(START)에 조인했고, 빌 클린턴 정부가 들어선 후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 옐친의 비민주적인 정치행태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행정부가 '옐친 정책'의 후원자가 됐던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대세로 굳히려 했던 미국의 계획이었다.

 

옐친은 두 번의 대통령직 역임하는 동안 IMF와 다른 국제 대출 기관들로부터 미국 달러 700억을 빌렸다. 러시아 정부의 세수는 갈수록 떨어져 재정수입의 10%에 불과했다. 기업과 금융기관에서 탈세, 절세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IMF 등이 러시아에 주는 차관이 민간은 물론, 정부 차원에서 횡령되거나 유용되는 사례도 비일비재한 상태였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로 흘러든 국제금융기관과 민간투자자들의 돈 1,300억 달러 가운데 적어도 700억 달러가 이런 식으로 빼돌려져 서방으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1998년 옐친 정부는 재정 부족으로 모라토리엄(지급유예. 공황 등에 의해 경제가 혼란하고 채무이행이 어려워진 경우 국가의 공권력으로 일정 기간 채무의 이행을 연기 또는 유예하는 일)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1999년 5월 15일, 러시아 국가두마(하원)는 다시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5개 항의 탄핵안을 심의했다. 하지만 제1당인 공산당에 대항해 중도 및 민족주의 성향의 의원들이 대거 옐친을 지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결과 5개 항 모두 가결에 필요한 정족수(재적 3분의 2)인 300표 이상의 찬성표를 얻지 못해 부결되었다.

 

1998년부터 1999년 사이 총리를 4명이나 교체한 옐친은 1999년 8월 또다시 총리 세르게이 스테파신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러시아 대통령 비서실장, 러시아 연방보안국의 국장 등을 역임한 블라디미르 푸틴을 임명했다. 당시 건강이 안 좋은 옐친을 대신해 푸틴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으며 옐친이 벌인 일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옐친은 올리가르히를 성장시킨 부패와 부정의 대명사가 되면서 국민 신뢰도는 10%도 안 되었다.

 

친서방적 옐친의 시대는 끝났다

 

옐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임은 바닥을 찍고 있었다. 이에 1999년 12월 31일 옐친은 러시아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대통령 사임 발표를 했다. 이때 옐친은 더는 권력을 쥐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소련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 국민의 희망을 이뤄내지 못한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러시아는 새로운 정치인들, 또 지적이면서도 강력하고 정력적인 새로운 인물들과 함께 새로운 세기를 맞이해야 한다”라며 사임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옐친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푸틴에게 사임 후에도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러시아를 파탄의 경지까지 이끌면서 친서방적이었던 옐친의 시대는 마무리되었다. 

 

2006년 러시아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센터'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의 9%만이 옐친 전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고, 33%는 중립을, 그리고 55%가 부정적 혹은 아주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 응답자의 70%는 옐친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했다.

 

옐친이 주권선언을 채택하던 1990년을 회고하며  바부린은 “만일 우리가 1990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가 겪었던 쓰디쓴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 주권선언문을 날조한 주역 두 명을 떨쳐냈을 것이다. 바로 고르바초프와 옐친이다. 한 명은 (소련) 권좌에서 몰아내야 했고 다른 한 명은 (러시아) 권좌에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가 만일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달리 행동했을 것이며 소련의 붕괴도 허용치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주권선언문에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내용을 포함했다. 이들 두 명의 지도자는 서로 싸우는 통에 선언문을 왜곡시켰다”라고 평가했다.

 

이에 반해 옐친이 우호적이었던 서방의 평가는 달랐다. 

 

서방 인사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든 존드로 전 미 백악관 안보회의 대변인의 “러시아 격변과 도전의 시기에 활약한 역사적 인물”이라는 말부터 로버트 게이츠 전 미 국방부 장관은 “그는 러시아 민주화의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미국인들은 탱크 위에 올라 쿠데타를 저지하던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말했다. 또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조국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시기에 활약한 탁월한 인물이었다. 러시아 역사에 있어 민주주의와 경제개혁을 도입하고 개혁을 옹호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옐친은 여러 차례의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의 신임을 얻고 헌법상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려고 했다. 그리고 국민과 러시아를 생각하지 않은 정책들로 옐친은 오히려 러시아를 최악의 상황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옐친은 서방과 친하게 지내며 조언을 구하고 차관을 빌릴 뿐이었다. 즉 러시아 국민은 비난하고 서방은 칭찬하는 러시아 대통령 옐친이다. 

 

다음은 [러시아 읽기] 마지막 편 푸틴 시대이다. 

 

[러시아 읽기] 6. 흐루쇼프부터 고르바쵸프까지..그들만의 정치-> http://www.jajusibo.com/5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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